통영 비진도, 사량도
일어나자마자 유난히 입 속이 까끌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이상하게 뭘 먹어도 맛이 없고 일도 잘 안 풀린다. 여행을 가도, 집에 처박혀있어도 그런 날이 있다.
아무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무리해서 일찍 탄 버스에선 잠을 거의 못 잤고 생리에 멀미에 편두통까지 겹쳤다. 그럼에도 날 움직이게 했던 힘은 환불불가 숙소 예약이었다. 환불불가만 아니었으면 오래 전에 취소했을 여행이었다. 늦어도 당일 새벽엔 취소했을 여행이었다.
멀미를 머금고 찾았던 맛집 여행지 정보는 전부 다 버스에 고스란히 담아 서울로 돌려보냈다. 맛집이고 뭐고 숙소에서 가서 눕고싶었다. 숙소는 불길할 정도로 조용하고 어두웠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다 빼고 결론만 말하면 아고다가 중간에서 뻘짓을 해서 숙소 측에서는 내가 올 줄 몰랐던거였다. 어찌저찌해서 아고다에서 보상도 받고 해결은 잘 됐지만 안그래도 없던 맥이 턱하고 풀려버렸다.
화장실을 통해서 방으로 들어가는 요상한 구조인 방은 아무리 봐도 정이 안갔다. 난로에 난방까지 틀고 말랑해진 초코송이를 먹으면서 뒹굴대다가 이불을 펴서 누웠다.
한참을 뒹굴다가 짧은 여행이어서, 하루를 이렇게 버리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일몰이라도 보러 나갔으나 역시 하루는 내 편이 아니었다. 배차간격이 30분이었던 버스는 30분을 그대로 기다려서 탔고, 도착한 공원은 멋있긴했지만 큰 감흥이 없었다. 얼굴에 꽂히는 칼바람에 일몰도 포기했다. 인도도 없는 비탈길을 내려가서 겨우 도착한 카페에선 라스트 오더 시간이 5분 지났다며 쫓겨났다(사장님이 소금이라도 뿌릴 기세였음). 그나마 날 붙잡고있었던 그래도의 끈이 끊겼다. 그래도 멀리 왔으니까, 그래도 시간이 아까우니까, 그래도 좋을 수 있잖아? 그래도. 그래도.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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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가진 않았지만 곧 날라갈 게 확실한 바람막이가 설치된 버스정류소엔 엉뜨의자가 있었다. 바깥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20분을 내리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바람막이가 있는데다가 엉덩이까지 데워주는 데에서 버스를 기다릴 수 있다는 그 소소한 일에 행복할 준비가 돼있었다. 옆에 있던 외국인은 날 대신해서 버스가 오는지 안오는지 망을 봐주다가 버스가 오니 버스가 왔다며 같이 나가자고 했다. 혼자였으면 놓쳤을 수도 있는 버스였다. 쉽게 행복했다.
돌아가는 버스에서 본 일몰은 아주 엉망이었다. 아래 깔린 구름에 해는 점점 가려졌고 여명도 거의 없는 그런 일몰이었는데 웃음이 나왔다. 엉망진창인 일몰이 주는 악랄한 위로였다. 비록 버스는 누구보다 오래 기다렸고, 카페에서도 내쳐진데다가 일몰은 못 봤지만 어차피 추위에 덜덜 떨며 기다려서 봤어도 별로일 일몰이었다고. 나는 나만의 승자가 됐다.
비록 저녁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탱이를 당해서 밀치회를 아주 비싼 가격에 사서 먹었지만(마가 껴도 단단히 낀 날이긴 했다) 아주머니가 서비스라며 수줍게 꺼내주셨던 곶감은 엄청나게 맛있었다. 밀치회는 눈탱이를 한번 더 맞더라도 다시 먹고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멀리서보면 모두의 인생은 0인게 아닐까. -1과 +1 사이에서 불안정한 전자처럼 끊임없이 왔다갔다하는거지. 요약해서 말하면 0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하나 확대해서 보면 절대 0이 아닌 그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