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수-한국 산 탐방기 (1) 강릉 괘방산

2020년 10월, 강릉, 괘방산

by 장인

어디서 봤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네이버맵에 별 표시를 해둔다. 꾸준한 게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내가 거의 유일하게 꾸준히 하는 일이다. 괘방산은 별 800개 중 하나였다.

강릉 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서부시장에 들렀다. 시장 규모는 작았고 아침이라 연 가게도 적었지만 감자적(오타 아님)을 파는 음식점을 찾아냈다. 처음 본 주문진 동동주는 선택이 아닌 필수. 주문진 동동주에선 장수막걸리에서 나는 인위적인 단맛이 안 나서 좋았고, 탄산도 강해서 깔끔했다. 쩝. 또 마시고 싶다. 바로 물에 담겨있던 감자를 건져서 강판에 갈아 부쳐주셨다. 전은 지글지글 소리부터 맛있다. 아침에, 평상에 앉아서 감자적에 막걸리를 마신다? 무릉도원이다. 익숙한 감동과 새로운 감동 사이 어딘가에 여행의 묘미가 있다.

버스시간이 가까워져서 정류장까지 뛰어서 버스를 타야 했는데 그 와중에 싸전 샐러드 빵은 먹어야 해서 더 빨리 뛰어서 싸전까지 들렸다가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는 정시에 출발했다. 강릉 버스는 대부분 정시 출발이라 뚜벅이가 여행하기 좋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아우토반 버금가는 속도와 핸들링으로 시골길을 달렸고 예상 소요시간보다 15분 빠르게 안인 삼거리에 도착했다.

미리 사온 생수를 소중히 가지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목표는 안인 삼거리에서 정동진이었지만 큰 애착이 있는 목표는 아니어서 힘들면 중간에 내려 올 요량이었다. 시작은 계단이었지만 곧 오르기 편한 흙길이 나왔고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10분도 안돼서 왼쪽으론 바다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거기서 조금 더 오르니 오른쪽으로도 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르막길 대부분은 그늘이 많은 숲길이 었는데 평화로운 숲길 사이사이엔 트랩 같은 흙길 오르막이 가끔 섞여있어서 땀범벅이 됐다. 힘들다는 느낌은 잘 안드는 신기한 길이었다.

40분 정도 오르니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고, 마지막 10분 고비를 지나고 나니 활공장이었다. 왜 모든 산은 마지막 10분이 그렇게 고비여야 하는 건지 의문이다. 아 그냥 마지막 10분에 내 체력이 바닥나는걸 수도 있다.

활공장이 어떤지는 사진을 봐서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좋았다. 기대를 정말 많이 했는데도 좋았다. 앞으론 탁 트인 바다가 있었고, 옆으론 이름 모를 산들이 겹쳐 서있었다. 예전엔 사람들이 텐트를 치는 공간으로 썼던 데크 그늘막에 앉아서 끝없는 바다를 보는데 가방에 있는 샐러드 빵이 생각났다. 가방에서 외투에 샐러드 빵까지 꺼내고 나니 지금 이 순간 필요한 모든 게 내 손안에 있었다. 애플 워치가 운동 끝났냐고 물어볼 정도로 오래 앉아있다가 활공장을 떠났다.

활공장에서 너무 크게 감동해서 더 감동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동명락가사 갈림길까지 길은 더 좋았다. 활공장은 바다라면 여기는 산과 바다였고, 활공장까지만 다녀 간 사람들 멱살 잡고 끌고 오고 싶었다.


여기서 너무 큰 감동을 받아버려서 잘못된 선택을 했는데, 왠지 더 멋진 풍광이 나타날 것 같아서 정동진 쪽으로 더 걸어보기로 한 거다. 동명락가사로 내려가는 게 풍광이 낫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도.......


바보 같은 선택엔 대가가 따라왔다. 가도 가도 숲 길만 나왔고 뒤로 돌아가기에도 애매하고 앞으로 가기도 애매한 지점부터 발이 아프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화가 번거로워서 러닝화를 신고 올라갔는데 생각보다 돌이 많아서 발가락이랑 발바닥에 무리가 많이 간 것 같았다. 젠장!


정동진은 포기하고 등명해변 쪽으로 틀어서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길에 들어섰는데 인적이 너무 드물었다. 사람을 피해서 여기까지 오긴 했다만 사람이 너무 없어서 멧돼지가 나와버리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노래를 끄고 숲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숲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조금만 들려도 걸음 속도가 올라갔다. 속도가 오르고 오르다 못해 막판엔 거의 뛰다시피 해서 내려온 것 같다. 이건 사람 길이 아니고 멧돼지 길이라는 생각이 확신으로 변해갈 때쯤 갈림길이 나왔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차 소리가 나는 길 쪽으로 나갔다. 정말 뜬금없이 차도가 나왔고 살아 내려와서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얼마 전에 괘방산에 다시 갔을 때는 동명락가사 쪽으로 내려왔는데 힘든 구간 없이 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올 수 있었다. 코스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코스로 가는 게 현명하다. 생각해보니 청계산 갔을 때에도 이상한 코스로 갔다가 개고생 했는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악! 나는 평생 이런 나랑 살아야 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