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혁 Jul 17. 2022

박찬욱이 쉽게 풀어쓴, 사랑이라는 감정

영화 <헤어질 결심> 리뷰

한줄평: 

알고리즘과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차가운 기계 따위는 번역할 수 없는, 

펄펄 끓는 인간의 사랑이라는 무모한 감정. 


박찬욱의 서사에는 '사랑'이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사랑이라는 주제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이병헌을 향한 김태우의 시선을 쫓아가면, 그 너머에는 동경을 넘어선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솔직히 박찬욱이 그동안 그려온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대중의 정서에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박찬욱의 '사랑'은 두근거림이나 설렘과 거리가 멀다. 박찬욱이 말하는 사랑은 철저한 육체적인 욕망, 혹은 더 큰 목표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올드보이>의 근친상간부터, <박쥐>에서 뱀파이어가 된 송강호가 친구의 아내를 탐하거나 <아가씨>에서 숙희와 히데코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만 보더라도 금세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가슴보다는 머리가 먼저 반응하는, 아름다움보다는 약간의 불쾌함이 먼저 느껴지는 그런 유의 사랑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물론 여기서 등장하는 사랑도 '용의자와 사랑에 빠지는 형사'라는 다소 식상하면서도 비일상적인 설정의 사랑이기는 하다. 그러나 박찬욱은 이 비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오히려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일상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다.                   

주인공 해준 (박해일)은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형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틈만 나면 인공 눈물을 쓰고, 향이 좋은 핸드크림을 지니고 다니며, 그의 안주머니에는 민트와 립밤 등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치약과 칫솔이 가지런히 정리된 책상만 봐도 그의 성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극 중 서래(탕웨이)의 말을 빌리자면, 경찰치고는 품위가 있는 인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준은 이렇게 완벽하게 짜여진 자신의 세상이 흔들릴 때 오히려 쾌감을 느낀다. 생기 없는 그의 눈은 살인 사건같이 일상이 어긋나는 순간을 마주할 때면 빛이 난다. 또한 그는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있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누구보다 철저한 직업의식으로 뭉친 경찰이기도 하다.


규칙에 집착하지만, 이런 규칙을 벗어날 때 오히려 더 큰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 이런 해준의 완벽주의적 성격은 아내 정안에게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정안은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 관리 팀에서 일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항상 모니터링 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정안은 해준의 흡연도, 성관계도 자신이 통제권을 쥐고 있어야 한다. 해준은 어쩌면 이런 통제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해준의 앞에 어느 날 '서래'라는 낯선 이방인이 등장한다. 사망한 남편에게 학대당하고 있는 외국인 아내. 딱 보기에도 살인 사건의 제일 유력한 용의자. 이런 서래를 보고 해준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영화는 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서로의 눈빛으로 대신한다. 일상에서도 그렇듯, 사랑은 불현듯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해준은 경비 처리도 안 되는 비싼 초밥을 사주거나, 치약과 칫솔을 가져다주는 등 적극적으로 그의 호감을 표시한다. 덕분에 평범한 용의자와 형사 사이의 관계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기류들이 포착된다.


박찬욱이 지금까지 담아낸 '사랑'이라는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이렇게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은 사랑을 다룬다는 점이다. 분명히 경찰로서 서래와 거리를 둬야 하는 해준이 금기된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보여주며. 박찬욱은 왜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니냐며 오히려 관객에게 되묻는다. 그동안 박찬욱이 담아낸 사랑에 비하면 아주 대중적이고, 친절하게 풀어쓴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해준은 경찰로서의 직무로 위장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마음껏 드러낸다. 먼발치에서 숨어서 지켜보며 서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그녀와 함께 있는 듯한 상상을 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고민하던 해준에게, 어느 날 그가 그렇게 잡고 싶었던 범인 홍산오가 나타난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남자 홍산오. 어쩌면 해준의 미래와도 같은 그와 마침내 대면한 해준은 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하며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정한다. 왜 여자들은 쓰레기 같은 남자만 좋아하냐는 산오의 말에 해준은 그를 더 이상 잡아야 하는 대상인 살인범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그의 처지를 공감한다. 해준은 마침내 자신이 숨기고 싶었던 감정, 사랑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한다. 누군가는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무모한 사랑, 그 사랑을 자신도 해보기로. 


결국 사랑에 빠진 해준은 흐려진 판단력으로 서래를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며, 서래와의 사랑을 시작한다.       

서래는 존재만으로도 해준이 가지고 있던 고민을 모두 해결한다. 불면증에 시달렸던 해준은 이제 비좁은 차에서도 숙면을 취하고, 해결하지 못한 사건으로 머리를 싸매는 해준에게 남긴 서래의 몇 마디는 사건을 해결하는 단서가 된다. 그만큼 서래를 향한 해준의 사랑도 점점 깊어져만 간다.   


지난 박찬욱의 필모그래피에 비하면,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여느 로맨스 영화와 다름없이 아주 순한 맛으로 그려진다. 데이트를 하고, 핸드크림을 발라주고, 요리를 해주는 등 비교적 우리가 현실에서 흔하게 보는 사랑처럼 그려지는 장면들이 계속된다. 


이때 '언어'는 두 사람의 사랑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장벽은 처음부터 두 사이를 방해한다. 번역기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혼자 내뱉었던 서래의 말을 '그 남자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라는 의미심장한 뜻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그 말의 뜻은 심장이 아닌 '마음'이었다고 서래는 말한다.  


자신을 향한 서래의 감정이 실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해준은 서래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다. 마음과 심장. 미묘한 어감의 차이가 가져다준 '왜곡'은 오히려 둘의 사랑을 더 깊게 만들어주는 장치가 된다.        

서래와 해준은 두 사람 사이를 막고 서있는 언어의 벽을 '기술'의 힘을 빌려 극복하려고 한다. <헤어질 결심>에 등장하는 인간의 '첨단 기술'은 살인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하고, 해준과 서래의 마음을 전하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차가운 메탈로 만들어진 기술로 전하는, 두 사람의  펄펄 끓는 사랑이라는 감정. 그러나 그 차가운 기술은,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전달하지 못한다. 알고리즘과 시스템으로는 정의 내리기 어려운 사랑이라는 무모한 감정. 그 알 수 없는 감정에 둘은 서서히 빠져든다.  


유죄와 무죄. 범인과 피해자. 그동안 철저하게 흑과 백으로 분류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해준에게 서래의 존재는 멀리서 보면 색을 구분할 수 없는 그녀의 드레스처럼 미결, 알 수 없음이다. 산인지, 바다인지 구별할 수 없는 오묘한 서래의 벽지 색만 봐도 그렇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무모함보다, 이성이라는 냉정한 사고에 가까웠던 해준은 자신의 시스템으로는 번역하기 어려운 서래에게 흔들리다 못해 결국 붕괴된다. 


'나는 붕괴됐어요.' 경찰로서의 직업정신도, 충실한 가장이라는 지위도 모두 잃어버린 해준은 방황한다. 서래가 범인이라는 명백한 단서인 스마트폰을 발견한 해준은 결국 그 스마트폰을 깊은 바다에 던져버리라는 말과 함께 그녀를 떠난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던 둘의 이야기는 13개월 후, 이포라는 타지에서 다시 시작된다. 13개월 전과 마찬가지로 서래의 남편이 죽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이제 둘의 처지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초밥이라는 음식으로 그려진 해준의 호의는 흔한 핫도그 하나로 변해있고, 끝까지 서래를 믿으려고 했던 과거의 해준은 이제 서래의 모든 것을 의심한다.   


사랑의 주체도 달라져 있다. 자신의 무죄를 위해 해준을 이용했던 서래는, 이제 해준에게 사랑을 갈구한다.    

사람마다 슬픔의 속도가 다른 것처럼, 사랑의 속도 또한 다르다. 누군가는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잉크가 퍼져나가듯이 천천히 시작하기도 한다. 해준의 사랑이 이미 파도에 휩쓸려 떨어졌을 때, 탕웨이의 사랑은 마치 잉크처럼 천천히, 그러나 깊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증거가 남지 않게 스마트폰을 깊은 바다에 버려라는 해준의 말. 어쩌면 해준에게는 사랑의 종말 선고와도 같았을 그 말을 사랑으로 이해한 서래. 마음과 심장이라는 언어의 차이에서 시작된 둘의 사랑은, 끝까지 언어의 차이로 막을 내린다.


차가운 기계 따위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사랑. 언어도, 도덕도, 윤리도 모든 것을 뛰어넘는 그런 사랑. 뭐라 형용할 수 없지만 모두가 해본 그 사랑이라는 감정의 정수를 박찬욱은 <헤어질 결심>에 모두 담아낸다.                   

<헤어질 결심>은 새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함께 마무리된다. 박찬욱 감독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파도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는 무모함,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한다고 좋아하는 것을 중단합니까?' 서래의 어색한 번역체의 말투는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익숙한 감정을 낯설게 보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 모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무모한 사랑을 해보지 않았냐며 말이다. 


어쩌면 식상하고 밋밋하게 끝낼 수 있는 이야기의 틈들을 영화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영상미와 기발한 컷 구성으로 채워나간다. 특히 결말의 파도 장면은 영화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시각적, 청각적 압도감을 사용해 영화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온몸으로 느끼게 만든다. 


지금까지 그려냈던 사랑에 비하면 자극적인 맛은 최대한 덜어내고, 보편적인 이야기 속에서도 자신만의 색을 잃지 않은 박찬욱의 지독한 결심. 무엇보다도 이런 이야기를 통해 대중과의 끈을 놓지 않고 소통하고 싶어 하는 박찬욱의 진심이 느껴지는 영화.

매거진의 이전글 그들만의 전쟁이 아닌, 우리들의 전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