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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Jul 04. 2022

그들만의 전쟁이 아닌, 우리들의 전쟁

영화 <덩케르크>

크리스토퍼 놀란.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 낯선 이름은 어느 순간부터 믿음의 상징이 되었다.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그리고 <다크나이트> 3부작까지. 제목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이 영화들을 만든 거장의 다음 작품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 그것도 전쟁 영화라는 사실에 조금은 의아했다. 항상 범접할 수 없는 '상상력'으로 보는 눈을 즐겁게 만들었던 놀란이 어떻게 전쟁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펼쳐낼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들은 항상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철저하게 현실의 고증에 집중한 서사를 만들 것인가, 현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낼 것인가. 이런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감독은 항상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영화 <덩케르크>도 마찬가지다.


<덩케르크>가 찾은 해답은 사실을 다루되, '편집'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인생은 원테이크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로 향하는 방법 따위는 없다. 다만 영화에서는 이런 것들이 충분히 일어난다. 하늘에서의 1시간, 바다에서의 1일, 땅에서의 1주. <덩케르크>는 이 세 개의 시공간을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글로 써놔도 복잡해 보이는 이 과정을 놀란은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풀어낸다.                   

<덩케르크>는 더하기보다 빼기를 선택한 영화다. <다크나이트> 3부작처럼 선과 악에 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지지도 않고, <인터스텔라>처럼 복잡한 과학을 다루지도 않는다.


많은 것을 한 번에 다루는 대신, 불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빼며 메시지의 본질에 집중한다. 이미 놀란이 말했듯이, <덩케르크>는 전쟁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재난 영화에 가깝다. <덩케르크>의 재난은 독일군이다.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독일군을 피해 덩케르크에서 탈출해야 하는 30만 명의 군인들. 영화 속 등장하는 독일군은 그 실체가 완벽하게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다. 저 멀리 보이는 적기에서, 총알이 뚫고 지나간 흔적에서 그들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전쟁이라는 소재를 재난 영화의 형식을 빌려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하나, 바로 '생존'이다. 이 생존에 개인의 서사는 없다. 서사를 배제하면 개인이 아닌 사건만 남는다. 관객들은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들이 누구인지, 왜 이 재난에 휩쓸리게 됐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고, 도망가고, 맞서 싸우는 이들의 행방을 쫓아가기 바쁘다.


그 흔한 전쟁영화의 클리셰도 없다.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생존의 의지를 다지거나, 동료애나 애국심으로 귀결되는 장면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영화에 인물은 없다. 철저하게 모든 것이 '사건'의 흐름으로 진행된다. 덕분에 세 공간을 오가는 복잡한 연출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관객은 그저 이들이 어떻게 살아나가는가, 이 하나에만 집중하면 된다.                   

물론 개인의 서사가 아주 없지는 않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그 서사의 주인공이 전쟁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이 아닌, 배를 끌고 군인들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민간인이라는 점이다. 전쟁영화에서 민간인의 역할은 항상 수동적이었다. 전쟁의 참사를 보여주기 위한, 말 그대로 '소품'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러나 <덩케르크>는 이 민간인이라는 인물에 유일하게 서사를 부여하고, 나름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이 민간인이라는 역할을 통해 놀란은 전쟁은 단순히 전장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놓치기 쉬운 점이지만, 전쟁은 군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전쟁의 영향을 받는다.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서도 전쟁은 계속된다.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처럼 전쟁에서 죽어나갈 군인들을 구하기 위해 배를 돌린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시민들은 비웃거나 손가락질하는 대신,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준다. 


<덩케르크>는 누군가를 영웅으로 추대하지도 않는다. 전쟁 영화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흐름은 한 인물을 영웅으로 만들고, 다른 반대 세력들을 악역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한 끗 차이로 전쟁 영화는 프로파간다물이 되기도 하고, 반전 영화가 되기도 한다. 선과 악, 혹은 이념의 대립으로 쉽게 단순화할 수 있는 이야기를 <덩케르크>는 생존의 문제로 풀어낸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이 목표 하나만을 가지고 질주한다. 적을 죽이겠다거나,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겠다는 야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 <덩케르크>는 전쟁영화보다 오히려 재난영화에 가깝다. 관객을 전쟁의 한 복판에 던져놓는 연출을 통해 놀란은 관객이 영화의 흐름에 쓸려 떠밀려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런 메시지를 차치하고, 단순히 장르영화로서의 관점으로만 보더라도 <덩케르크>는 흠잡을 데가 없다. 특히 그 백미는 한스 짐머가 맡은 음악이다. 현악기의 불안한 음색은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을 놓칠 수 없게 만들고, 광활한 하늘과 바다를 마치 다큐처럼 온전히 보여주는 연출은 영화가 아닌 실제 기록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든다. 특히 전작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배인에 이어, 헬멧에 얼굴을 가린 채 눈빛만으로 모든 것을 전달하는 역을 또 한 번 맡은 톰 하디는 자신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냈다.  


사실 기존 놀란 감독의 영화를 기대하고 본다면, 조금은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는, 최소한의 재료를 최대한 활용해 내는 놀란의 연출력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마치 오랫동안 우려낸 차 한잔 같이 깊이감이 있는 영화다.  


시작할 때쯤만 해도 어리둥절한 이런 연출은 중반이 되어서야 갈피가 잡히기 시작하고, 결말에 이르게 되어서야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이곳에 전쟁의 승리나 패배자는 없다. 살아남은 자들과, 살아남지 못한 자들만 있을 뿐이다. 




에디터의 더 많은 영화 이야기는 여기서 만나보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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