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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Aug 02. 2022

추리극의 탈을 쓴 현대 사회 우화

영화 <나이브스 아웃> 리뷰

어디가 초조해 보이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웅성거린다. 바로 그때, 어수선한 분위기를 헤치고 코트를 입은 한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사내에게로 향한다. 마침내 사내의 입이 열리더니 이내 충격적인 말을 내뱉는다. '범인은 바로 이 안에 있습니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봐왔던, 익숙한 장면이다.  


한때 서점에 가면, 한 코너의 벽장이 아예 추리 소설로만 가득 채워져 있을 정도로 추리 소설 또는 탐정 소설의 인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지금도 추리극이라는 장르, 탐정이라는 소재의 위상은 여전하다. 


물론 지금이야 보편적인 하나의 문학 장르이자 흔한 소재로 자리 잡았지만, 추리 소설의 황금기였던 19세기 당시 추리소설은 그저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었다. 당시 영국 사회는 산업혁명과 의료, 농업 기술의 발달로 인구 성장률이 비약적이던 시기였다. 문제는 바로 그 인구 성장률에서 시작됐다. 


일하려는 사람은 많고,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으니 노동자의 임금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경제권이 없는 여성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당장 일거리를 찾지 못한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매춘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1881년 런던의 인구 기록에 따르면 당시 런던에만 약 2만 명이 넘는 매춘부가 있을 정도로 매춘은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그 유명한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매일같이 살인 사건이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설상가상으로 20년이 넘게 대불황이 지속되던 당시 영국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바로 이때 탐정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이성과 지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소설'이라는 문학적 렌즈로 마침내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셜록 홈즈로 대표되는 이성적, 지성적, 육체적으로 완벽한 '탐정'의 존재는 이 혼란스러운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자 당시 영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절대적 영웅과도 같았다. 한 쪽에서는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가 날뛰고, 한 쪽에서는 명탐정 셜록 홈즈가 떠오르는, 선과 악이 공존하던 아이러니한 시기. 당시 탐정소설은 단순한 문학이 아닌, 사회상을 반영한 일종의 트렌드였던 셈이다.

  

이런 탐정 소설의 탄생 배경을 알고 영화 <나이브스 아웃>을 보면, 영화의 의도가 더 한눈에 들어온다.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 시리즈를 통해 19세기 당시의 영국 사회상을 이해하려고 했다면, 라이언 존슨 감독은 <나이브스 아웃>을 통해 추리소설의 장르를 빌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해 날카로운 일침을 날린다. 마치 당시 사회상으로부터 탄생했던 탐정 소설의 기원을 다시 되찾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나이브스 아웃>은 유명한 미스터리 작가 할런의 사망과 함께 시작된다. 용의자는 그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던 할런 가의 사람들. 그리고 역시 추리극에 빠질 수 없는 탐정도 등장한다. 바로 우리에겐 007 시리즈로 유명한 다니엘 크레이그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포스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나이브스 아웃>의 주인공은 탐정이 아니다.   


추리극의 주인공이 탐정이 아니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이 영화에서 탐정의 역은 어디까지나 진실을 밝혀내는 수동적인 역할에만 머무른다. <나이브스 아웃>의 주인공은 탐정 다니엘 크레이그도, 크리스 에반스도 아닌 간병인 마르타다. 이민자 출신의 여성 간병인. 고전 추리 소설이었다면 극의 주인공은 커녕, 단서를 던져주는 엑스트라 정도로만 묘사됐을 정도의 인물이다. 한 마디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이 인물의 시점에서 <나이브스 아웃>의 모든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런 의외성은 인물뿐만 아니라 영화의 스토리에도 나타난다. 사실 추리극이라는 것은 굉장히 단순한 구조로 흘러가기 쉽다. 사건의 발생 - 단서 파악 - 추리 - 결말 또는 반전. 앞서 언급한 탐정들이 사람들을 모아두고 추리를 펼치는, 어디선가 흔히 봤던 장면들 또한 이런 추리극의 대표적인 클리셰이기도 하다. 

<나이브스 아웃>은 이런 클리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야기의 초중반부터 사건의 진상을 공개하는 강수를 둔다. <나이브스 아웃>은 단순히 '누가' 범인인지를 밝히는 '후더닛 (whodunit)'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추리'는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추리라는 장치까지 빌려 이 영화가 직접 하고 싶은 이야기, 화두를 던지고 싶은 사회적 문제는 바로 '차별'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차별'이라는 사회적 문제는 적나라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차별처럼 은연중에, 하지만 분명하게 나타난다. 모두가 마르타를 '우리 가족의 일원'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마르타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첫째 사위 리처드는 다 마신 컵을 자연스럽게 마르타에게 건넨다. 그 일은 마르타가 해야 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화는 '리처드'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우리 사회가 쉬쉬하고 있었던 불편한 진실들을 하나둘씩 꺼내 든다. 그는 '마르타'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이민자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지 못한다. 대신 불법적 이민자와 합법적 이민자, 즉 '나쁜 이민자와 착한 이민자'라는 아주 편협하고 편리한 이분법적인 사고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결국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허용하는 기준 내에서 허락된 자유다. 심지어 '합법적 이민자'라고 알고 있는 마르타에게도 할란 가의 사람들의 태도는 다른 '불법적 이민자'를 대우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는 마르타를 포함한 할런 가의 사람들 VS 탐정이라는 전형적인 추리극의 구도로 시작하는가 싶더니 마침내 마르타 VS 할런 가의 사람들간의 갈등으로 전환되며 본격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차별'이라는 주제를 꺼낸다. 


할리 가는 우리 사회의 작은 군상과도 같다. SNS로 정치를 배우는 10대, 뷰티 업계의 허영, 필요할 때만 '가족'이라는 혈연주의로 묶이는 사람들. 기시감이 드는 이 사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자 우리 자신이다. 

누구보다 관대하고 깨어있는 척하지만, 사실은 변화를 두려워하며 마르타 같은 이민자들이 자신의 소유물들을 빼앗아 가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존재들. 그러나 원래부터 자신들의 소유였다고 믿었던 할런 가의 대저택이 실은 파키스탄 재벌에게 매입했던 집이었던 것 처럼, <나이브스 아웃>은 누군가의 기원을 따지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말한다. 정작 미국인들이 말하는 '자신들의 땅'이 실은 인디언들의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변화를 이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거부가 아닌, 수용이다. 소설가인 할런이 그의 직업에 맞게 허구를 사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짓'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과 달리,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진실을 따랐던 마르타가 그녀의 방식으로 이 추리극에서 승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이브스 아웃>에서 진실을 밝혀 내는 인물은 탐정일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르타다. 우리는 지금 이야기의 주인공이 마르타로 교체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이브스 아웃>에서 린다 역을 맡은 제이미 리 커티스가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인 것은 영화 외적으로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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