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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Dec 09. 2022

닭장을 나온 백호

영화 <화이트 타이거> 리뷰 

필리핀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 집에는 같이 살면서 집안일을 도와주는 필리핀 현지인들이 몇 명 있었다. 빨래, 설거지, 청소 그리고 요리까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집안일은 그들의 몫이었다. 아침에 내놓은 빨래는 저녁이 되면 마치 우렁각시라도 왔다 간 것처럼 말끔하게 세탁이 되어 있었고, 방바닥은 먼지가 쌓일 틈 없이 항상 윤기가 흘렀다.   


우리는 그들을 '아떼'라고 불렀다 아때는 따갈로그어로 'sister'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몇 년 동안 그 사람들을 이름이 아닌, '아저씨'나 '아줌마'와 같은 호칭으로만 불렀다는 것이다. 내가 받던 한 달 용돈이 그들이 받는 월급의 몇 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외국인만 보면 달려들었던 길거리의 걸인들을 봤을 때, 처음으로 '계급'이라는 어떤 투명한 유리 벽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때 내 용돈은 한 달에 10만 원이었다. 


계급. 특히 자본주의를 논할 때 계급은 빠질 수 없는 단어다. 그동안 많은 영화들이 이 자본주의의 계급이라는 주제를 다뤄왔지만, <화이트 타이거>처럼 노골적이고 찝찝하며 현실적인 작품은 드물다. <기생충>이 미묘한 비유와 상징성으로 조심스럽게 이 주제를 다뤘다면, 상류층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빈민층이라는 공통된 이야기를 다루는 <화이트 타이거>는 좀 더 직접적이고 과감하게 현실의 껍질을 한 풀 벗겨낸다. 

인도에는 '카스트'라는 신분제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흔히 알고 있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그리고 수드라 - 이 네 가지 계급 외에도 수천 개의 계급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과거에 계급을 결정짓는 것이 철저히 피에서 피로 이어지는 혈연이었다면, 자본주의 사회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계급을 결정짓는 건 바로 '돈'이다. 영화 <화이트 타이거>는 카스트라는 전통의 신분제가 현대의 자본주의와 결탁해 벌어지는 이 기묘한 현상을 성공한 스타트업 CEO가 된 현재의 발람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데서 시작된다.


<화이트 타이거>의 나레이터이자 주인공인 발람은 먼 옛날 인도가 가장 부유했을 때 천 개의 카스트와 천 개의 숙명이 있다고 말한다. 발람의 카스트는 '할와이'다. 할와이의 숙명은 과자류나 단것을 만드는 것이다. 발람의 소원은 단 하나, 자신에게 놓인 이 숙명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영어를 읽지도 못하는 반 친구들과는 달리 영어를 읽고, 영특함을 뽐내던 어린 시절의 발람은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화이트 타이거다'라는 최고의 칭찬을 듣는다. 영화의 제목이자, 중요한 상징이기도 한 '화이트 타이거', 즉 백호는 한 세기에 한 번만 나오는 영물이다. 어둡기만 한 자신의 미래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본 발람, 그러나 아버지가 오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빚을 물려받은 발람은 학교가 아닌 허름한 찻집에서 일을 시작한다. 


발람은 계급의 최하층인 이곳에서마저 석탄을 깨는 일이라는, 가장 낮은 일을 맡는다. 말 그대로 바닥 중에 바닥까지 내려앉은 발람은 자신과 같은 하층민들의 처지를 '닭장 속의 닭'으로 비유한다. 눈 앞에서 동료가 목이 잘리고 죽어도,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닭. 발람은 자신이 그저 한 마리의 닭이 아닌, 백호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의 지주 가족에게 접근해 그들의 충직한 '하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비슷한 계급 서사를 다루는 영화 <기생충>에서 가족이라는 존재가 서로 힘을 합쳐 가난을 이겨내는 동료처럼 그려진다면, <화이트 타이거>는 전혀 다르다. 발람의 가족들은 마치 함지박에 담긴 꽃게처럼, 서로를 끌어내리기에 바쁘다. 전통적인 인도 사회에서 집안의 우두머리 역할을 수행하는 발람의 할머니는 영화 내내 발람을 이 닭장 속에서 나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결국 발람은 자신이 버는 모든 돈을 바치겠다는 조건 아래 할머니에게 돈을 빌려 운전 강습을 받고, 지주의 아들 중 하나인 유학생 출신 '아쇽'의 운전기사가 되는데 성공한다. 

마침내 자신이 그렇게 꿈꾸던 상류층의 삶에 발을 디딘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삶의 진실을 마주한다. 자신에게 꿈과 희망을 줬던 낮은 카스트 출신의 여성 정치인의 부패, 그리고 그런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려는 상류층의 민낯. 그저 낭만적으로만 보였던 그들의 세계는 생각보다 더 더러웠고, 자신이 사는 닭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델리의 거물 정치인에게 뇌물을 먹이려는 지주 가족의 계획을 알게 된 발람은, 그토록 원하던 대도시로 가기 위해 자신보다 오래 일한 운전기사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폭로해 그를 자리에서 몰아낸다. 결국 자신 역시 할머니처럼 닭장 속의 또 다른 닭을 바닥으로 끌어내린 발람은 점점 더 그들과 가깝게 생활하며 마치 자신도 이 부류의 일원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발람의 입에서는 여전히 악취가 나고, 옷은 때가 꼬질꼬질하며, 사람들 앞에서 사타구니를 긁는 등 그의 정체성은 여전히 하층민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발람은 아쇽의 아내 핑키 부인의 충고를 들으며 이를 닦고, 옷과 구두를 사는 등 점점 변화한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사회의 것들을 배울수록, 발람은 점점 더 자신의 출생과 자신의 가족들을 원망하게 된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발람에게 할머니가 닭고기를 권하자, 발람은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반항하며 이런 '닭'의 처지에서 벗어나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화이트 타이거>에는 세 부류의 인물들이 존재한다. 주인공 발람이 속한 하층민들, 발람의 주인인 지주가 속한 상류층. 그리고 아쇽이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기존의 전통적인 계급 사회를 거부하고 새로운 변화를 주장하는 새로운 계급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아쇽 또한 결국 하나의 새로운 '계급'이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단순히 상류층=악, 하류층=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들이밀지 않는다. 언뜻 보면 발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듯한 아쇽 또한 은연중에 발람을 '개벽시켜야 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우하지 않는다. 결국 아쇽 또한 전통적인 계급주의에 동화되며 자신이 거부하던 가족들의 차별적인 태도를 그대로 닮아간다. 영화는 각자 자신의 이득을 따라 움직이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곳에 절대적인 선이나 악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발람이 유일하게 믿었던 상류층 인물인 아쇽과 핑키 부인마저 자신을 뺑소니 사건의 범인으로 만들려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자신이 숭배하던 상류층 인간들을 더 이상 동경의 시선이 아닌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제 발람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닌, 명예다. 태생을 지우고 아쇽의 가족처럼 마치 원래부터 이곳에서 존재했던 사람이 되는 것.  

영화는 현실의 벽 앞에 무너져 내린 이상의 가치들을 '무하마드 간디의 동상'이라는 상징으로 보여준다. 자유와 평등을 외쳤던 그의 동상 앞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상류층의 모습. 결국 자신이 거부하던 상류층의 모습과 똑같이 변해버리는 아쇽. 끝까지 발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던 핑키 부인마저 결국 인도를 떠나버리는 모습을 통해 현재 인도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영화의 초반부터 등장하던 백호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말로만 듣던 그 '백호'를 직접 바라보는 뜻깊은 순간, 그러나 발람이 꿈꾸던 그 백호 역시 닭장 속에 갇혀있는 닭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다. 그나마 저항할 의지라도 드러내며 케이지 속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백호가 될 것인가, 목적도 의지도 잃어버린 닭이 될 것인가. 그러나 결국 이 둘 모두 어딘가에 갇혀있는 신세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백호를 드디어 만난 발람은 마침내 결심한다. 이 케이지 속에서의 삶을 끝내겠다고. 발람은 아쇽을 살해하고, 그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기 위해 들고 다니던 가방 속 현금을 챙겨 아쇽이 말하던 혁신 도시 벵갈루루로 떠난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상류층의 생리를 파악한 발람은 이제 그들이 하던 대로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사업을 장악해 나간다. 발람이 차린 택시 스타트업 회사의 이름은 '화이트 타이거'다. 

 발람은 그렇게 마침내 닭장을 탈출한다. <화이트 타이거>는 권선징악이나, 최소한의 죄책감을 느끼는 발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는 발람의 입을 빌려 우리가 믿어오던 일념의 가치들을 뒤집어 버리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영화는 여전히 이 닭장 속에서 탈출하지 못한 '닭'들의 모습들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한 가지 기묘한 점은 이들을 절대 동정 어린 시선이나, 감정적인 연출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이들이 '발람'이 그랬던 것처럼 주인을 몰아내고 위로 올라설 것이라는 암시를 남기는 듯, 오히려 어딘가 결의에 찬 얼굴들을 보여주며 찝찝한 여운을 남긴다. 


빈곤층이 위로 올라갈 방법은 두 가지, 범죄와 정치라는 이 절망적인 이야기가 해피엔딩이라고 말하며 오히려 희망을 바라보게 만드는 연출이 이 비극을 더 절망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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