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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Dec 20. 2022

영화 <올빼미> 리뷰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무모하게 만들어낸 사극풍 현대식 스릴러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무모하게 만들어낸 사극풍 현대식 스릴러


사극과 스릴러. 언뜻 보면 전혀 결이 다른 이 두 장르를 접목하려는 시도는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이미 이 분야에서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혈의 누>, 외진 오두막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세 인물의 갈등을 다룬다는 실험적인 연출이 담긴 박정훈 감독의 <혈투>까지.  


그렇다면 과연 <올빼미>에는 무엇이 있는가. 살인자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라는 구성은 이런 장르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던 설정 중 하나지만 우리는 <올빼미>의 배경이 철저한 계급 사회였던 조선시대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영화에는 두 가지 계급이 존재한다. 하나는 신분제라는 시대적 계급과, 또 다른 하나는 장애와 비장애인 사이의 사회적 계급이다. <올빼미>의 주인공인 천경수는 이 모든 계급에서 항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사회적으로도 미천한 신분에, 소경이라는 신체적 결함은 항상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영화는 바로 이 '계급'과 그 차이로 인한 소통의 부재에 집중한다. 


이 영화에서 시각적 장애는 극의 서스펜스를 위한 단순한 스릴러적 장치를 넘어, 일종의 상징성으로도 여러 차례 사용된다. 계급 사회인 조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해야 한다는 천경수의 대사에는 <올빼미>가 담아내고 싶었던 메시지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자신을 속이는 장사꾼을 보고도 묵묵히 넘어갔던 천경수는, 자신이 목격한 진실을 주시하는 대신 눈을 감아버리며 조선이라는 계급 사회에서 생존해 간다.  


<올빼미>에서 '본다'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가장 기본적인 시각이라는 감각과, 외면하고 있었던 사회의 진실을 직면하는 것. 실제로는 밤이 되면 조금씩은 볼 수 있는 주맹증 환자지만, 다른 이들의 시선이 두려워 그렇게 모든 것을 눈 감아 왔던 천경수는 소현세자를 만난 후 비로소 감각이 아닌 사회적인 눈을 뜬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천경수와 달리 시력이 온전한 비장애인이자 타지 생활을 통해 식견을 넓힌, 사회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눈을 뜬' 인물로 등장한다. 소현세자에게 본다는 것은 단순한 감각의 영역이 아닌, 더 넓은 세상을 본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그에게 아버지 인조는 '보는 눈이 바뀌었다'라며 경계심을 드러낸다. 


살기 위해 눈을 뜬 소현세자와, 눈을 감은 천경수. 서로 대비되는 생존 방식을 택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각자가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모든 것을 직접 봐야만 했던 소현세자에게 천경수는 가끔은 봐도 못 본 척도 해야 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소현세자는 천경수에게 그럴수록 눈을 뜨고 살아야 한다며 작은 것도 크게 '볼 수' 있는 확대경을 선물로 하사한다.    


이는 주맹증이라는 그의 신체적 결함과, 조선 땅에서만 평생을 갇혀 지냈던 그가 마침내 사회적으로 외부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천경수는 그동안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 어쩌면 보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들을 마침내 보게 되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시각이라는 감각을 본연의 목적인 서스펜스를 위한 장치로 번뜩이는 연출을 선보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담아내는 상징성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극이 흐를수록, 점점 이런 상징성은 은연중이 아닌 등장인물의 다소 직설적인 대사를 통한 너무나도 정직한 방식을 통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인 메시지 또한 담아내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초반에 쌓아 올린 촘촘한 서사들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자신이 외면했던 진실을 주시하는 소경과, 자신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는 왕이라는 상징적인 메시지 하나를 위해 핍진성 없는 결말로 마무리되어야만 했는지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올빼미>의 강점이자 약점은 바로, 영화적 상상력을 바르게 사용한 예와 과하게 시용한 예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빛과 어둠을 활용한 스릴러적 연출은 영화의 정체성을 십분 드러낸 명장면들이 많지만, 사극이라는 정체성을 잊은 채 스릴러 연출에만 집중하는 장면들은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왕과 서민이라는 사회적 계급의 대립에서 시작해 단순하게 목격자와 살인자의 구도로 흘러가는 영화의 방향도 아쉽다. 영화는 신분과 장애라는 사회적 계급과 격차에서 나오는 텐션을 유지하지 않고, 너무나도 쉽게 정면돌파를 통해 갈등을 풀어버린다. 배경이 현대라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스토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뒤흔들다 보니 초반에 쌓아 올린 몰입은 허망하게 깨져버린다.  


이런 공백들을 채우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얼마 되지 않는 등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짙게 남기고 간 김성철과 첫 사극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류준열의 존재는 영화를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기둥 같은 역할을 해낸다.  


그러나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단순화되는 갈등 구조로 인해 평면화된 인조의 캐릭터는 기대 이하다. 관객들이 기대했던 '왕'으로서의 유해진은 얼마 등장하지 않고, 그동안 익숙하게 봐온 악역 유해진의 모습만 기억에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빼미>는 그동안 익숙하게 봐왔던 한국영화식 결말을 향해 무작정 달리는 영화가 아니다.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미리 말하고, 충실하게 관객들의 니즈를 충족시킨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올빼미>의 흥행은 타당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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