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혁 Jan 31. 2023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미식 스릴러

영화 <더 메뉴> 리뷰

처음으로 참치 코스 요리를 먹으러 간 날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비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틀은 원하는 걸 아무거나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인 한 식당의 디너 코스였다. 자리에 앉자 2~3가지의 전채 요리가 나오고, 곧이어 요리사의 손에 들린 참치가 테이블 위에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요리사는 익숙한  듯 참치의 각 부위에 대해 긴 설명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설명을 마친 요리사는 잠시 후 건너편 테이블로 간 후, 똑같은 설명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문득 그 모습을 보고 있자 갑자기 허무함이 몰려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망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첫 번째로는 내가 받은, 이 유일해 보이는 서비스가 누구나 돈만 내면 받을 수 있는 서비스라는 실망감. 두 번째로는 이 모든 상황이 익숙한듯 요리사와 전문적인 대화를 나누던 건너편 테이블의 사람들과는 달리,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던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I AM WHAT I EAT.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이 오래된 영어 격언은 더 이상 건강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음식은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요깃거리가 아닌, 먹는 이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음식의 가격은 곧 그 사람의 경제력과 연결되고, 음식의 퀄리티는 곧 그 사람의 퀄리티와 마찬가지다. 음식은 이제 권력이다. 우리는 더 이상 살기 위해 먹지 않는다. 

영화 <더 메뉴>의 세계에서도 역시 이런 현상은 똑같이 일어난다. 유명 셰프 슬로윅의 고급 레스토랑, 호손. 이곳을 찾은 12인의 손님들은 모두 저마다의 목적을 가진 채 이 식당을 방문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경제력을 과시하기 위해, 또 누군가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오로지 아무런 목적 없이 순수하게 이 식당을 방문한 인물은 주인공인 마고, 단 한 명뿐이다. 


영화의 주요 소재부터 배경까지 아예 레스토랑인 이 영화. 하나부터 열까지 오로지 음식만을 다루는 이 영화의 제목은 <더 메뉴>다. 음식 영화의 제목이 '메뉴'라니 그럴 법 하지만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다. 그 누구도 메뉴를 보기 위해 식당을 찾지 않는다. 메뉴는 어디까지나 음식을 소개하는 소품일 뿐,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메뉴'라는 부수적인 소품을 영화의 제목으로 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음식이 아닌, 메뉴이기 때문이다. 비밀스러운 고급 레스토랑 호손을 찾은 손님들에게 음식은 단지 한 끼 식사가 아닌, 자신들의 위치를 증명하는 자리다. 이들은 주린 배를 채우는 음식의 본질 그 자체가 아닌, 음식이 속한 '메뉴'에 집착한다. 정작 몇 번이나 이 레스토랑을 방문한 단골은 그동안 먹었던 음식의 이름 하나도 대지 못하면서 말이다. 

레스토랑을 찾은 대중들은 음식을 먹으며 각자의 목적만큼이나 가지각색인 반응을 보인다. 셰프 슬로윅의 철학에 순수하게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저 건너편에는 마고처럼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중이 있다. 평론가들은 음식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와중에 어떻게 하면 자신을 더 돋보이게 만들 수 있을지 단어들을 선택한다. 돈이 많은 비즈니스맨들은 틈만 나면 자신들의 경제력을 무기 삼아 레스토랑의 규칙에 덤벼든다. 


그러나 재밌는 점은 그들 중 어느 한 명도 주어진 메뉴를 거부하지 않으며 순응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빵 없이 에멀젼과 오일만 있는 빵요리를 내가도, 손님들의 불평은 잠시뿐 모두가 주어진 메뉴를 수동적으로 먹기만 한다. 심지어 마고와 함께 온 타일러는 역사적 풍자와 음식에 담긴 이야기를 엮어냈다며 셰프 슬로윅을 찬양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모두가 슬로윅이 만든 '메뉴'에 광신도처럼 열광하고 있을 때 마고는 홀로 그가 제공하는 음식을 먹는 것을 거부하며, 마치 이 레스토랑의 신처럼 군림하고 있는 셰프 슬로윅이 만든 모든 시스템에 반기를 들고 나선다. 마고의 논리는 간단하다. 레스토랑은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음식은 먹었을 때 배가 불러야 한다는 것. 음식의 외적인 가치에 온통 신경이 팔려있는 다른 손님들과 달리, 마고는 음식의 뿌리 그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이야기는 '음식'이라는 단어를 '예술'로 바꿔도 똑같이 적용된다. 예술가의 의도도 모른 채 그저 예술가의 이름에 눈이 멀어 열광하는 대중, 어떻게든 예술가를 깎아내리기 위해 흠집을 찾는 평론가들 그리고 예술의 본질인 '아름다움'이 아닌 예술의 가격표에만 눈길을 두고 있는 부자들. 


<더 셰프>는 고급 레스토랑 호손이라는 장소를 빌려, 현대사회의 예술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화두를 던진다. 영화는 셰프 슬로윅과 손님들 사이의 신경전을 보여주며 예술을 다루는 현대사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하며, 셰프 슬로윅의 대사를 통해 예술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직업적 고민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음식을 위해 이 섬까지 찾아왔다고 말하지만 정작 음식이 아닌 메뉴에 집착하는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예술에 열광하는 척'하는 관객들의 모습까지 하나의 풍자거리로 담아낸다. 마치 한 편의 이솝우화를 보는 듯, 영화의 장면 하나, 인물의 대사 하나 모두 이런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해 낸다. 물론 메시지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조미료같이 자극적인 연출을 통해, 영화적 재미도 빠트리지 않는다. 영화 전체가 말 그대로 하나의 코스 요리인 것처럼. 

영화의 등장하는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뉜다. 결국 누군가를 만족시켜야만 하는 사람들인 예술가들과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손님들인 대중. 이 둘의 갈등은 현실이 그러하듯, 영화 속에서도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영화는 이런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들을 남겨 놓는다. 이를테면 셰프 슬로윅이 그토록 악담을 퍼붓던 영화배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슈퍼스타로 그려지는 장면처럼말이다.


영화는 이런 실마리들을 통해 예술은 결국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가치이며, 이런 가치를 서로 존중할 때야말로 모두가 윈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요리나 예술에는 관심도 없던 문외한인 마고가 셰프 슬로윅의 메시지를 유일하게 간파해 낸 것처럼 말이다. 


모두가 음식이 아닌, 껍데기인 메뉴를 보고 있을 때 마고는 홀로 먹는 즐거움과 만드는 이의 사랑 즉 음식의 본질을 지적하며 예술가인 슬로윅의 초심을 자극해낸다. 음식을 만들었을 때 처음 느꼈던 순수했던 행복과 성취감, 셰프라는 예술가의 길을 걷게 만든 그 근본적인 뿌리를.

'셰프는 어차피 먹어서 소화될 것들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영화 속 슬로윅의 대사처럼, 예술이라는 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무쓸모'의 영역에 가깝다.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을 만드는 기술 (craft)과 달리, 예술은 굳이 삶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데서 그 의미를 찾는다.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이 모든 것들은 craft의 영역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비효율적인 일들이다.


그러나 그 비효율적인 일들을 통해 우리는 위안을 얻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삶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영화 속 마지막 코스 요리인 스모어가 영양학적으로 보면 형편없는 쓰레기지만, 지극히 '맛'이라는 본질에만 집중한 이 자극적인 요리를 보며 아이러니하게도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예술은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임에 분명하다.   


영화의 제목인 '메뉴'에는 무수히 많은 뜻이 담겨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의미는 음식이라는 본질이자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극히 일부분인 메뉴에 열광하는 대중이다. 영화 속 손님들이 그랬듯 우리는 오늘도 결코 주리지 못할 배를 채우기 위해 당장 눈앞의 싸구려 음식을 씹으면서, 텅 빈 배를 채울 수 있는 값비싼 메뉴를 찾아 나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올빼미>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