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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May 23. 2023

난 슬플 때 빨래를 해

적당히 슬퍼지는 법 


아마 모든 자취생들이 그렇듯, 주말은 밀린 집안일을 하는 대대적인 날이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느꼈던 낙 중 하나는 바로 섬유 유연제였다. 군대에서부터 시작된 이 섬유 유연제와의 인연은 참 질기다. 평소 같으면 신경도 안 썼을 종이 섬유 유연제 몇 장 하나에 우리들은 참 행복해했다. 빨래에서 좋은 향이 나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구나. 그때 느낀 사소한 인생의 진리는 지금도 여전하다. 어디서 이런 향이 좋다는 소식만 들으면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은 다우니의 실내 건조용 섬유 유연제다. 파란색의 플라스틱 병에, 달달한 자스민 향이라고 적혀있지만 진짜 자스민의 향은 어떤지 잘 모른다. 현대 사회의 병폐다. 방 한구석에서도 한 번도 보지 않은 것을 마치 본 것처럼 알 수 있지만 그게 맞는 정답인지 모른다. 어렸을 때는 바나나 우유의 바나나맛이 진짜 바나나라고 믿었던 것처럼, 인공적인 향이 점점 자연의 향을 대체하고 있다. 그래도 뭐, 향은 좋으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한다. 


빨래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중용이다. 아무리 더러운 빨래라도, 세제를 더 넣는다고 더 깨끗해지진 않는다. 섬유 유연제도 마찬가지다. 좋은 향이라고 왕창 부어버리면, 옷장이 며칠 내내 섬유 유연제 냄새로 진동을 한다. 뭐든지 적정량이 필요하다. 계량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눈대중으로 세제를 붓다가, 거품이 도저히 빠지지 않아 하루 종일 세탁기만 돌리며 얻은 귀중한 교훈이다. 가끔은 이론으로 배운 교훈보다, 경험으로 얻은 교훈이 더 뼈아프다. 


세탁만큼 중요한 과정이 건조다. 그 핵심은 건조기다. 건조기를 처음 알게 된 것도 군대에서인데, 이쯤 되면 군대에 뭐가 진짜 있긴 한가보다. 건조기에 돌린 빨래는 자연 건조로 마른 빨래와는 느낌이 다르다. 훨씬 더 보송하고, 건조기의 열기 덕분에 자연스럽게 다림질을 한 듯 빳빳함을 유지한다. 요즘 세탁기는 건조 기능도 있다길래 기대를 품었지만, 우리 집 세탁기는 클래식이다. 건조 기능이 있을 리가 없다. 대신 건조대는 있다. 집주인 분의 배려로 공짜로 얻은 건조대인데, 받치는 부분이 부러져 있다. 일단은 쓰는 데 별지장이 없어서 다행이다. 


빨래를 탁탁 털고 건조대에 널다 보면 덩달아 나도 깨끗해진 느낌이다. 섬유 유연제 냄새가 얼마나 나는지에 따라 그날의 세탁 상태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섬유 유연제를 적당히 넣은 날은 코를 빨래에 푹 박아야 은은한 향기가 느껴진다. 반대로 과하게 넣은 날에는 빨래를 널 때부터 섬유 유연제 냄새가 좁은 방 안을 진동한다. 무슨 요일에 빨래를 하느냐에 따라 기분도 달라진다. 토요일의 빨래는 여유롭다. 어차피 내일도 쉬는 날이니까, 일주일을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빨래를 넌다.


반대로 일요일의 빨래는 조급함이다. 당장 이 빨래가 마르지 않으면 어제 썼던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야 하고, 덜 마른 축축한 옷을 입고 출근을 할 수도 있다. 토요일의 빨래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즐길 수 있다면 일요일의 빨래는 과정은 필요 없다. 어떻게든 마른 빨래라는 결과값을 내놓아야만 한다. 그렇게 빨래를 하다 보면 어느새 주말이 다 끝나간다. 다음 주에는 좀 더 여유롭게 빨래를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림없지, 같은 상황의 반복이다. 


오늘의 레터는 좋아하는 뮤지컬 <빨래>의 넘버의 가사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빨래라는 뮤지컬을 알게 된 건 <놀면 뭐하니?>의 방구석 콘서트에서였다. 빨래라는 집안일 하나를 가지고 뮤지컬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생각보다 엄청 깊이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빨래 하나에 인생이 담겨있다. 빨래는 인생이다.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뮤지컬 <빨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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