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혁 Jan 04. 2024

소감문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아도 


새해가 되면 마치 다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신년의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곤 합니다. 그리고 마치 그런 것들이 금방이라도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면요. 그래서인지 저는 계획을 짜는 걸 좋아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늘 새해 계획을 짜는 데는 인색한 편입니다. 어쩌면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흐름에 덤덤해지는 성격 탓일지도 모르겠네요. 또, 가끔은 계획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긴 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영화 속 누군가가 말했듯,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따라 자주 하곤 합니다. 이 글에 '소감문'이라는 제목을 붙여준 것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소감문이라는 구실로 벌써 어제가 되어버린 2023년의 안부를 전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는 새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두 번의 퇴사와 두 번의 입사. 이렇게 보니 회사가 제 삶의 전부가 된 것처럼 보여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지만 뭐 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부턴가 제가 누구인지 소개하는 것보다, 저의 소속을 밝히는 게 좀 더 간편한 자기소개가 된 것 같거든요.) 그 과정 속에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새로운 일과 상황들, 또 무수히 많은 새로운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직을 하면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인터넷 속 누군가가 남긴 격언들을 보면서, 어렸을 때의 나처럼 내가 또 도망을 치고 있지는 않은 건지 스스로에게 의심을 품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시점에서 돌아보자면, 저는 그 선택들이 도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한 '도약'이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최고의 선택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제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들을 해왔다고 믿습니다. 원체 잘 후회를 하지 않는 성격도 여기에 한몫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선택들이 가리키고 있는 최종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저의 목표는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기입니다. 굳이 새해라서가 아니라, 항상 저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더 나은 사람. 늘 마음에 담고 사는 말이지만, 사실 저는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량적 또는 정성적 지표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인지, 또한 지금의 상태에서 좀 더 나은 내가 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이점이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우선 정성적인 지표에서 보면 저는 좀 더 밝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과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다정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오늘 저녁에 갑자기 생긴 약속도 도망치듯 빠져나왔으니까요. 아직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기가 빨리고, 귀소본능이 폭발하지만 그래도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정량적인 자표에서 보면 작년보다 근육량이 더 늘었습니다. 운동을 시작한 지 벌써 2년 정도가 넘었네요. 저도 이렇게 제가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아마 주변에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 많이 만난 덕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싼 헬스장을 잘 찾은 덕분인 것 같습니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말은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기도 합니다. 회사에서, 관계에서, 집단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그 가치를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일. 사실 지금까지는 이런 증명 방식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문득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내가 아닌 타인의 시선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지금까지 인생이라는 것이 정해진 '표준'에 최대한 가까워지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학교를 가고, 좋은 직장을 가는 것 또한 그 표준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함이라고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누군가가 정한 지도 모르는 그 표준이라는 것을 쫓아, 내가 아닌 남이 정해준 목표를 따라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확실한 건 누군가가 정해준 그 삶 안에 '나'라는 사람의 고유함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사실,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강한듯하지만 여리고, 이성적인듯하지만 감정적이고, 사람을 싫어하면서도 또다시 사람에게 기대고 또다시 상처를 받고. 자애로운 척하면서, 남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폭력적인 상상들을 하고. 이중적인 모습들이 오가는 제 모습을 보며 어떤 것이 진짜 나의 모습인지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모습조차 제 MBTI로 설명이 된다고 하자 안심이 되더군요.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나의 모습 속에서 이제는 불안이 아닌 가능성을 보고자 합니다. 또 하나 고백하자면, 전 불안이 많은 성격인 것 같습니다. 아, 올해 새해 목표가 생겼네요. 올해는 불안을 덜어내고 덤덤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사실 불안하다는 건 예민하다는 거고, 예민하다는 건 그만큼 외부의 자극에 쉽게 반응한다는 뜻이기에 이처럼 창작자의 성격에 딱 맞는 특징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불필요한 불안은 최대한 줄여보려고 합니다. 저의 영역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것들을 해보려고요.


또 올해 제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신앙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목사님 또는 선교사님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참 싫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수식어 속에 저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믿음이라는 것이 안 그래도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버린 나라는 사람을 지우개로 지우듯 박박 문지르는 것 같이 공포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많이 흘렀지만, 지금에야 제자리를 향해 점점 돌아가고 있는 듯해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직업이 목사님이라는 사실이 싫어서 가정환경조사서에 '회사원'이라고 적었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많이 나아졌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적다 보니 소감문이 아닌 반성문이 된 것 같아 보이지만, 글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여전히 밤마다 자주 깨곤 하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다가도 다가오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잠시 방황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점점 더 많은 것들을 감당해 내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나이를 허투루 먹지는 않았구나 싶어 기특하기도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저의 시선일 뿐이지만요. 정말 마지막으로,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더 명확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 되었든, 사물이 되었든, 혹은 형체가 없는 것이 되더라도요. 흐릿하게 살기보다는, 진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제가 받은 사랑을 돌려줄 수 있는 적당한 여유로움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당신 역시 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넉넉한 빈틈이 있기를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디터로 산다는 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