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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현 Jan 30. 2024

나 사용설명서

너 자신을 알라


 엊그제 본 어떤 음악플리 영상의 사진이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람의 본업은 나를 알아가는 것이고, 인생을 사는 건 부업이라는 글이 담긴 사진.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해서 그런 글을 큰 종이에 적어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있었을까.


 나는 꼬맹이 시절부터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들과, 선택 앞에서 어떤 걸 골라야 좋을지 모르게 만드는 상황 속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힘들었었다. 그저 해야 해서 한 설거지도 누군가에겐 나를 착한 척하는 따돌림의 대상으로 욕할 수 있는 짓이었고, 아무 생각 없이 한 말들이 누구에겐 나를 시기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었다. 내가 무얼 원하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마치 내가 뭔가를 원하고 행동한 것 마냥 해석하는 사회 무리에서 순진했던 나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나쁜 무리에 껴 보려고 나쁜 말을 쓰고 담배를 물어도 영 후회만 남는 게 나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무엇일까. 나의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왜 난 이렇게 태어난 걸까. 어리고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하던 생각들은 무언가의 결핍과 나로 인해 일어나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 때문인 것 같다. 지금에 와서는 어린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렇게 자라난 나는 나에 대한 궁금증을 여러 방법으로 풀고 있다.


 상담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아닌 사람들을 내가 통제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나를 자꾸 맞추려고 하면 내가 사라져서 사는 것 같지 않고 힘들었을 거라고 얘기해 주셨다. 맞는 말이다. 엊그제 봤다던 그 음악플리 사진의 마지막 말이 '재가 되기 전에.'였다. 그리고 댓글에는 '숨 쉴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들처럼 나도 나를 탐구하지 않는 사회 속에선 내가 시체가 되어 이 몸뚱아리만 책임지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문득 그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큰 숨을 쉬어내고 나니 숨이 붙은 것 같았다. 사라지고 싶지 않은 나를 내가 큰 숨으로 붙잡아 두고,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통제가 되어 내가 상처를 받는 상황 자체를 없앨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들에게 무능력한 시체이기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런 취급을 받을 때마다 나도 항상 당황하는데 어리지 않은 지금의 나는 나를 버리지 않는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더 빨라졌다.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이 능력이 없는 거지 내가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다. 고로 난 숨 쉬고 살아있고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


 나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게 된 후로는 사주도 많이 봤고, 타로도 많이 봤다. 할 수 있는 심리테스트는 보이면 다 했고, 적성 검사부터 성격 유형검사까지 마치 아무리 알려줘도 난 나를 모르겠다는 듯이 닥치는 대로 했다. MBTI가 유행이 된 요즘, 나와 비슷한 흥미를 가진 친구가 나를 대상으로 에니어그램 테스트를 해준 적이 있었다. 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가면서 그 친구는 나를 점점 모르겠다고 했다. 나도 나를 아직도 모르겠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바뀌어서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는 모습이 정말 다양한 것. 그래도 난 혼자임이 제일 편안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이 많다는 것. 그렇다고 책임질 수 없는 모습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붙잡고 타이르는 나의 모습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상적인 관계 속에서의 나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리더의 면모를 가졌다는 것. 모난 사회의 스스럼없이 미움을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쓰레기 마저 사랑할 수 있는 미련한 존재인 것. 



 작년 초의 나한테는 나의 이 다양한 모습에 내가 적응하기 어려웠다. 재작년의 나를 평가하던 두 사회에서 나를 너무 극과 극으로 평가했기에 진짜 내가 누구인지, 혹시 내가 가식을 떠는 게 아닌가 하고 나 스스로 경멸할 뻔도 했다. 다행히도 상담을 매주 받으면서 그게 가식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세상엔 정말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많은 사회 속에서 내 역할(role)을 잘 수행하는 것이라는 말에 안도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느꼈다. 나에겐 책임감이라는 것이 대단하게 자리 잡고 있구나. 그래서 쉬운 포기를 못하는구나 하고.


 아직도 나는 나를 탐색해야 한다. 갑자기 든 생각이다. 사실 나를 탐구한다는 것만큼 즐겁고 흥미로운 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처럼 즐겁기만 하다. 다만, 얼른 나를 잘 알아내야 나를 잘 사용하면서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여때껏 살아온 내 인생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한 타이밍에 깨달은 거다. 그저 재미로 이 나이에 지겨운 사주를 그렇게 보고도 또 사주를 돈 주고 결제한 지금에서야.


 종교 따위나 미신, 운 같은 것에 나를 기대거나 아예 세상 탓만 하고 변명만 해대는 여느 젊은이 같은 사람은 아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적당한 재미와 호기심으로 따라온 것이지, 나에게 믿음이란 오로지 선한 것과 사랑에 대한 것들 뿐이다. 그래서 아는 모든 방법들로 나를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작을 가졌으면 하고 바란다. 우리가 모두 자신에 대한 회고와 탐구를 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더 좋은 영향을 주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이제 막 시작한 24년은 처음이 너무 고난인지라 내 앞길이 예상되지 않지만, 무너지는 마음만큼 채울 수 있는 사랑들이 내 옆에 정말 많으니까 걱정은 없다. 그러니 버티다 보면 누가 뭐라 해도 난 내가 원한 사람의 어떤 정도는 따라잡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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