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인혁 Apr 25. 2020

상식을 부수다. <멜로가 체질>

클리셰의 해체와 性 담론을 던지다.

 

 <멜로가 체질>은 <극한직업>, <스물>을 연출한 이병헌 감독의 첫 드라마 작품이다. ‘수다 블록퍼스터’의 컨셉이며 서른 살인 세 여성 캐릭터들의 고민과 연애, 일상을 그린 코믹 드라마이다.     

   

jtbc <멜로가 체질>




끝으로부터 시작하는 사랑

      

 일반적으로 한국 드라마는 러브라인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일본 드라마는 교훈을, 미국 드라마는 일을, 한국 드라마는 사랑을”이라는 유명한 말도 있다. 물론 러브라인은 드라마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없애지 못한 점은 한계이긴 하지만, <멜로가 체질> 자체가 성숙한 사랑에 대해 논하고 있기에 러브라인을 없앨 수는 없었다. 기존 드라마들과 러브라인의 존재의 유무는 동일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점은 드라마의 이야기가 사랑의 시작이 아닌 끝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드라마는 ‘만남–사랑-위기-결실’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멜로가 체질>은 ‘결실-파괴-재시작’으로 이루어진다.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명의 여주인공은 각각 연인과 헤어진 상태로 1화를 시작한다. 그 이후에 서사가 진행되어가며 그들이 헤어진 과정과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새로운 순서로 재정립된 드라마는 새로운 관점에서 사랑을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오히려 현실적인 측면을 나타낸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멜로가 체질> 1화의 첫 장면은 전통적 신파극을 시청하며 비판하는 세 여주인공의 말로 시작된다.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첫 장면에 기존의 드라마들을 모두 모아 한 번에 비판하며 자신들은 다르다는 강한 어필을 볼 수 있었고, 참신하게 클리셰라는 틀을 부수었다고 생각한다.



 같은 드라마     


 분명 드라마인데, 연극이 생각난다. ‘수다 블록퍼스터’라고 소개하는 드라마인 것처럼 대사에 상당히 공을 들였고, 문체를 사용했으며 상당히 과장되고 어색한 말을 사용하였다. 배우가 잘 소화해 내주어 다행이지, 대사 자체의 향기가 너무 강해 모든 인물이 같은 말투를 사용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더불어 다른 드라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카메라를 쳐다보는 장면과 나레이션이 나오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또한, 패러디가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다. <응답하라1988>의 ‘정봉’으로 많이 알려진 배우 안재홍이 ‘범수’역을 맡으며 <응답하라1988>에서의 “할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지.”나 ‘진주’가 “생긴 건 정봉이 같이 생겨가지고.”와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또한, ‘한주’의 조연으로 나오는 공명은 <멜로가 체질>과 같은 감독이 맡은 영화 <극한직업>에 출연하였다. ‘수원 왕갈비 통닭’으로 유명한 영화의 설정과 연결시켜 <멜로가 체질>에서도 닭을 튀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웃음을 자아냈다. 나아가 <도깨비>의 “파국이다.”, <태양의 후예>의 “군인이니까 여자친구 없겠네요?”와 같은 패러디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배우는 얼마나 그 역할을 소화해냈는지로 평가를 받는다. 배우 본인이 과거에 맡았던 역할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연기를 한다면, 명배우라는 타이틀까지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멜로가 체질>은 이를 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같은 배우의 과거 다른 역할의 등장인물’을 잠시 소환시켜 <멜로가 체질>을 보고 있지만, <응답하라1988>이나 <극한직업>의 기억도 환기해주는 중간다리 역할도 했다. 전형적 드라마보다 드라마의 경계를 흐리는 극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드라마  드라마     


 ‘범수’는 스타 감독이고 ‘진주’는 드라마 작가이다. <멜로가 체질> 속 함께 작업하는 드라마는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라는 작품이다.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는 ‘진주’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멜로가 체질>과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는 드라마의 흐름을 보았을 때, 같은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작품 속에서 작품을 만드는 특이한 구조임을 알 수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기성세대로 대표되는 방송국의 국장들은 ‘진주’의 작품을 이상한 드라마로 취급하며 비판한다. 반면, ‘범수’는 ‘진주’의 작품을 ‘판을 깨는 신선한 드라마’라고 말한다. 이렇듯, <멜로가 체질> 속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에 대한 평가와 이야깃거리들은 간접적으로 제작진들이 <멜로가 체질>의 시청자들에게 건네는 일종의 어필이자 변명이다. 이를 기사나 SNS 등 다른 매체를 통해 전하지 않고, 드라마 자체로 전할 수 있다는 것도 신선하고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드라마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주로 방송국이다. ‘한주’는 드라마에 들어가는 PPL을 담당하고, ‘범수’는 드라마 PD이니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멜로가 체질>은 과도한 PPL을 사용했지만 밉지 않은 드라마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방송국에서 드라마나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장면을 넣고, 드라마 속 드라마에 PPL을 넣어서 자연스럽게 연출해 낸다. PPL을 <멜로가 체질> 시청에 방해가 될 정도로 넣어도 무리가 없다. 시청자들에게 그 PPL은 <멜로가 체질>의 것이 아닌, 드라마 속 누군가의 프로그램 속 PPL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로가 체질>에서 PPL은 면죄부를 가진다. 따라서 <멜로가 체질>은 광고주와의 계약은 일정 시간 상품의 노출이기에 계약도 지키며 비판도 피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진정한 위로     


 “힘내”

 우리는 일반적인 드라마에서 서로에게 위로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이 사소한 말은 로맨틱하기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멜로가 체질>에서는 본질을 파고드는 것에 집중했다.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힘을 더 내라고 하는 말은 어쩌면 공감이나 위로가 아닌 상대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은 말뿐인 폭력일 수도 있다. <멜로가 체질>에서는 이를 혁파했다. 겉뿐인 말과 멋지게 보이기 위한 설정들 대신 진정한 공감을 통한 위로를 보여주었다. 세 명의 여주인공들은 힘든 일이 있을 때, 말뿐인 조언이나 멋진 위로의 말 대신 함께 있어 주었다.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힘듦을 나누었다. <멜로가 체질>은 허상과 멋짐을 버리고 본질을 얻었다.    

               

나를 안아주려 하는 그대 그 품이, 나를 잠재우고 나를 쉬게 한다.
위로하려 하지 않는 그대 모습이 나에게 큰 위로였다.

 드라마 OST <위로-권진아> 中


드라마 속 여성     


 항상 시청률 두 자릿수 이상을 기록하며 동기간 대의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KBS의 저녁 드라마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기존의 성공한 드라마들은 언제나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이 그렇지 않은 남성에게 의지하며 사랑을 이루는 서사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여성 시청자의 판타지를 채워주는 데에 있어서 기여하였고, 드라마를 주요 엔터테인먼트로 키우는 데에 일조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여성 캐릭터들은 의지하고 남자 배우의 부인, 애인으로만 기억되어오며 구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데렐라 스토리-끊임없는 재생산’을 통해 미디어 속 여성들은 남성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최근 여러 분야에서 페미니즘 담론이 나타나게 되며 영상 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화 <걸캅스>를 비롯한 영화나 드라마의 주도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도 미혼모를 설정으로 한 ‘동백’이 신데렐라를 깨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당찬 캐릭터로 등장함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동백’이 남성 캐릭터에게 심적으로 의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무조건적인 의지와는 다른, 동등한 주체의 만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멜로가 체질>은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사회에서의 여성     


 여사장이 운영하는 마케팅 회사에서 근무하는 ‘한주’와 다큐멘터리 감독 ‘은정’을 통해 감독은 사회 속 여성이 받는 불합리한 시선을 고발했다. 마초적 성격을 가진 남성 감독들 사이, PPL을 맡는 ‘한주’가 PPL에서 빠진 상품이 있다는 것에 대한 어필을 험악한 분위기의 조성, 성차별 발언 등으로 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오빠라고 불러보면 생각해 보겠다.’는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는 남성들에게 ‘한주’는 일부러 과장된 애교와 ‘오빠’라는 단어의 남발로 남성들이 원하는 것을 과장되게 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복수가 아닌 복수를 하기도 한다.

 미혼모인 그녀의 상황을 이해해주고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멋진 그녀의 사장 캐릭터도 주목을 받는다. 그녀는 시청자들에게 소위 ‘걸크러쉬’라고 불리며 진취적인 여성상과 함께 여성 연대의 실천을 보여준다.

 ‘은정’은 다큐멘터리 제작회사에 근무하다 상사의 갑질 및 성희롱에 분노하고 직장을 그만둔다. 남자 상사는 그녀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를 일삼고, 회식 때 술을 강요하며, 집까지 자신의 차를 운전하게 시킨다. 차 안에서도 성희롱을 시도하려고 할 때 그녀는 상사의 차를 쓰레기장에 박는다. 이 사건 이후 직장에서 나왔고, 그녀가 만들어낸 독립 다큐멘터리가 흥행에 성공하게 된다.

 이렇듯 <멜로가 체질>에서는 여성들이 각자의 개성에 맞게 불합리한 사회에 분노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두고 통쾌함을 느끼고 ‘걸크러쉬’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그 상황이 비일상적이기에 느끼는 감정이고, 이는 불합리한 것에 맞서 싸우는 것이 비일상이 된 것을 반증한다. 또한, ‘걸크러쉬’라는 단어는 '전통적으로 남성스러운' 여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결국, 전통적인 여성상과 남성상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다. 콘텐츠의 제작과 소비에서 우리는 항상 과거의 불합리한 것들을 재생산/소비하고 있는지 경계하면서 보아야 할 것이다.     



미혼모 캐릭터     


 <동백꽃 필 무렵>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미혼모 캐릭터를 <멜로가 체질>에서도 ‘한주’의 설정으로 가져왔다. 사회적으로 견고히 자리 잡은 가족 프레임에서 벗어난 미혼모는 성별을 떠나 모든 시청자의 무언가를 자극한다. 여성은 같은 여성이기에 공감할 것이고, 남성에게 있어서도 미혼모는 건드리면 안 되는 금기의 대상이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역할인 ‘육아’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직장’을 함께 하는 여성은 겉으로는 강인한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그 속은 깨지기 직전인, 지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성 담론을 뒤로하고 전통적인 사고로 드라마에만 집중하면 미혼모 캐릭터가 우리의 이목을 끄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미혼모 캐릭터는 과거의 상처,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삶에 지친 모습을 보여줌에서 시작한다. 나아가 그녀의 삶을 더욱 힘들게 설정하여 그 자체가 스스로에 대해 ‘나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라는 인식을 하게 만들기까지에 이른다. 이는 남성 주인공이 나타난 후에도 이어지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이 된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볼 수 있듯, 다가오는 남성을 밀어내는 모습까지도 보여준다. 충족되지 않은 그녀의 행복과 결핍은 감정이입을 한 대중의 동정을 자아낸다. 이후 비참한 모습의 그녀를 남성 주인공과 시청자가 ‘넌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로 위로하며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 크나큰 결핍이 충족되는 순간 보는 이의 행복은 몇 배로 돌아온다.

 <멜로가 체질>에서 ‘한주’는 사랑을 이루어내지는 못한다. 자신을 향해 다가온 남성에게 오히려 마음 어린 충고로 다시 남성의 기존 연인과 함께할 수 있게 도와준다. 현실적이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채워지지 않은 결핍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다.

 미혼모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고 다뤄짐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남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미혼부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제도적/사회적 이유 등으로 미혼부가 미혼모보다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로서 미혼부 캐릭터가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겠지만, 한 번쯤은 이를 다루는 콘텐츠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백꽃 필 무렵>의 미혼모 '동백'과 <멜로가 체질>의 미혼모 '한주'


소수자     


 <멜로가 체질>에서는 동성애자가 등장한다. 스크린에서는 가끔 등장하지만, 안방에서 퀴어를 보기는 쉽지 않았다. ‘은정’의 동생인 ‘효봉’과 효봉이 속한 밴드 스튜디오의 프로듀서 ‘문수’가 바로 그 커플이다. 아무리 기존의 드라마의 틀과 다투는 <멜로가 체질>이라 하더라도 동성애자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남성 커플 간 스킨십 위주의 연출보다는 그들이 소수자로서 한국에서 살아가며 겪을 수 있는 힘든 점들에 주목하였다. 예로, 게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 쫓겨나는 등의 모습이 있었다. 이렇듯 미디어를 통해 소수자의 삶을 보여주고, 이들이 겪는 불편함을 고발하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소수자이기에 무조건적으로 집중해야 한다는 ‘보여주기 위해 보여주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멜로가 체질>은 비교적으로 경직된 형식의 드라마 시장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남들이 시청률에 연연하여 재미있고,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지 못한 것을 이병헌 감독 특유의 코미디 서사로 현실화시켰다. 모든 회차의 대사들은 책을 만들어도 될 정도의 깊이와 여운을 남겨주었고, 변해가는 사회에 맞춘 유연한 드라마였다.

 시청률은 비록 1%대(최고 시청률 1.8%)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YouTube 클립에서는 다른 흥행에 성공한 드라마들과 비슷한 조회 수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에게 뒷심을 받고 있다. 또한, 넷플릭스 등 OTT 사업에도 진출하여 많은 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있고 시청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을 줄게.’ 달콤한 폭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