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을 지배하는 상황과 시스템의 힘을 주목하자.
최근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 약자들에 대해서 참혹할 만큼 끔찍한 행동을 지속적이고 반복하는 일들에 대해서 각종 미디어와 네티즌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와 태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장 행동들을 보며 우리는 분노하면서도 저런 사람들이 한 두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무기력을 느끼고는 합니다. 해당 사건이 문제로 대두되자 관계자를 문책하고 사과하며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내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분이 이미 느끼시겠지만 이 사건들을 개인만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더 큰 그림을 놓치게 됩니다. 바로 사건 속에서 약자의 입장에 놓여있는 잠재적 피해자들이 오히려 가해자의 행동에 동조하며 더욱 잔인한 행동을 보이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의 대다수들이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인간 말종적 태도를 보이기는 커녕 그야말로 좋은 평판에 평범한 행동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래서 개인 자체의 이상성향과 더불어서 이들을 악마로 돌변하게 만드는 상황과 시스템의 문제에 더 방점을 찍고자 합니다. 이것은 비단 특정 개인이나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나 군대에서의 심각한 왕따와 폭력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자살하는 사건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럼에도 언제나 책임소재를 '개인'에게 두면서 이를 강력하게 재기하고 재발방지책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2011년 7월 4일,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해병대 2사단 강화도 해안 초소 총기 난사사건과 10일 발생한 해병대 1사단 해병대원의 자살사건을 비롯 각종 병영 내의 가혹행위와 군기문란이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여론은 말할 것도 없고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서 관련 책임자들을 엄중 문책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할 것을 강력히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2005년 6월에도 육군28사단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경계초소에서 한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해 장병 8명이 사망하고 많은 이가 다치는 사건이 발생한 바 있습니다. 이 때도 선임병의 언어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저지른 우발적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도대체 가해자들은 왜 그리도 잔인할 정도로 동료들을 괴롭혔던 것일까요. 군내 구타와 가혹행위는 왜 근절되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문제를 일으키는 병사들을 사전에 걸러낼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2008년 발생했던 최진실씨의 자살 사건도 오버랩됩니다. 검찰이 최진실씨의 자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악성 루머의 최초 유포자를 찾기 위해 백방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로 수사가 종결되었습니다. 모든 소문에는 결국 근원지가 있을진대 검찰은 어째서 용의자 검거에 실패했을까 하며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겪을 때마다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비열하게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잔인하게 괴롭힐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며 분통을 터뜨리며 해당 관계자를 강력하게 처벌하기를 요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가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가해자들은 정말 인격적으로 치명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을까. 저 사람들이 군을 제대할 경우 더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저런 사람들은 조기에 찾아내서 감옥에 쳐 넣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들을 많이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가해자들의 대다수가 군 바깥 일상에서는 너무나도 착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특정 개인의 무책임함이나 악행의 문제라기 보다는 저 사람이 이렇게 악해지게 되었느냐의 환경적 요인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통해 여러분과 논의해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평범한 인간을 악마로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것에는 다들 공감하시죠. 그런데 아무리 착한 사람도 별것 아닌 상황에서도 악마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 몇가지 실험과 몇가지 사건들을 소개하며 그것에 관해서 계속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과연 여러분 자신은 이 속에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엔 가벼운 내용부터 시작해서 점점 수위를 높여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내용을 보시면 마음이 막막하실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우리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우리 자신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사건들이 하나의 이슈로 지나가는 문제가 아니라 뭔가 본질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대학에서 일련의 '집단 문제 해결'에 관한 실험을 위해 자원자를 뽑았습니다. 지원자는 세명씩 한 팀을 이루도록 했고 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전달되었습니다.
"이 실험의 목적은 문제 해결 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맞은 편 방에는 다른 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팀이 있다. 그들에게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제가 주어지게 되는데, 그들이 잘못을 할 때마다 벌을 주도록 해야 한다. 니네들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 전기 자극을 가해 주면 된다. 1부터 10까지 버튼들이 있으니 원하는 만큼을 누르면 된다. "
다시 말하면, 자원자들에게 맞은 편 방에 있는 사람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전기 충격을 주라는 것입니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맞은 편 방 사람들은 깜짝 놀라는 소리를 내거나 심지어는 비명을 지르기도 합니다. 실험 참가자들은 이렇게 버튼을 누르는 행위를 통해서 어떤 정도의 전기 강도가 (즉, 체벌이나 자극의 정도가) 사람의 학습에 가장 도움이 되는 수준일까를 생각하면서 버튼을 누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맞은 편 방에는 사실 전기 충격을 당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연구원이 소리를 낼 뿐이죠. 이 실험의 진짜 목적은 이런 전기자극 여부가 아니라 연구원들이 피실험자들의 감정을 교란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었습니다.
실험자들이 있는 곳의 옆방에서 연구원들이 조용히 속삭입니다. 실험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못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요. 한쪽 실험 그룹에는 '맞은 편 방 학생들이 정말이지 재수없는 야만적이고 짐승같은 인간들이더라... 밥맛없다'라고 얘기를 하고, 다른쪽 그룹에서는 '꽤 괜찮은 아이들이더라'라고 얘기를 합니다. 세번째 그룹에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런 얘기를 듣지 못한 그룹은 평균 5 정도를 눌렀습니다. 다른 실험군의 결과는 짐작이 가시죠? 야만적이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그룹은 무려 8을 눌렀습니다. 괜찮은 아이들이라는 얘기를 들은 그룹은 2-3를 눌렀구요.
무엇이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이 가시죠? 그래서 학생들에게 인터뷰를 했습니다. 왜 8을 눌렀어요? 그랬더니
'왠지 벌을 주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왠지 좋은 가르침을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책임감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답변이죠. 그들은 연구원들이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꾸며내서 자신들의 행동에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의심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분이 그냥 들었다는 것입니다. 한번도 본적도 만난적도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왠 '좋은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란 말입니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한테요.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고방식과 정상범위에 속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어딘가의 것과 닮아있지 않나요? 최진실씨가 사채설에 휩싸이고 최진실씨가 사실은 연예가에서 걸레같은 사람이었다는 악성 소문들... 이런 소문들을 아주 생생하고 실감나게 전하면서 행실이 정말 문제있는 여자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 주위에서 많이 보지 않으셨나요? 아니면 여러분 자신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요. 그 사람의 삶과 우리의 삶에 무슨 연관이 있다고 흥분을 해 가며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그러나 이것은 시작입니다. 이제 조금 더 강도를 높여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실험은 밴두라 실험과 비슷한데요, 조금 형식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교사-학습자'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요, 시간당 4$를 준다며 일련의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제비뽑기로 역할을 부여하죠. 교사와 학습자 중의 하나로요. 교사는 학습자에게 암기해야 할 일련의 단어 조합을 말해 주는데, 교사가 말한 단어의 짝이 되는 단어를 말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원숭이 엉덩이하면 '빨갛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정답을 맞추면 '잘했어요', '맞았어요'라는 말로 칭찬을 해 주고, 틀리면 벌을 가하게 되는데 그럴싸하게 생긴 전기충격 장치의 레버를 당겨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이 충격 장치에는 총 30개의 똑딱이 스위치가 붙어있는데, 제일 왼쪽의 것이 15볼트의 전기 충격을, 옆으로 갈수록 15V씩 강해지도록 고안된 것입니다. 그러니 총 450V까지 가할 수 있는 것이죠. 계기판에는 충격 수준의 전압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10단계(150V)에는 '강한 충격', 17단계(255V)에는 '격렬한 충격', 30단계는 불길하게 XXXX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교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전기 충격에 대한 감을 잡기 위해서 45V에 해당하는 3단계 전기 충격을 직접 느끼도록 했습니다. 약간 따끔한 수준입니다. 그런 다음 교사가 보는 앞에서 실험을 주관하는 연구원이 가죽 끈으로 학습자의 팔을 묶고 전극을 오른쪽 손목에 붙인 다음 옆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30단계의 전기충격기: 손가락에 전극을 연결, 전기충격을 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실험에서 전기충격을 받게 되는 학습자로 선발된 사람은 사실 짜고 치는 고스톱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전극을 손목에 붙여두긴 했지만 이건 가짜입니다. 교사의 질문에 의도적으로 틀린 대답을 하고, 전기충격 버튼을 눌렀을 때 진짜 전기에 놀란 것처럼 반응하는 것이 학습자의 미션입니다. 이 실험의 목적은 교사가 어느 정도까지 전기 충격으로 벌을 가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제 교사를 여러분이라고 가정하고 한번 얘기를 해 나가도록 할께요. 학습자는 처음 몇가지 질문에는 잘 대답하지만, 곧 실수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크지 않은 수준으로 전기 충격을 가합니다. 살짝~ 따끔할 정도로만. 근데 자꾸 틀립니다. 그래서 전기 충격을 또 가하는데, 학습자가 전기 충격이 점점 고통스럽다고 불평을 하는 소리가 너머에서 들립니다. 어라, 이놈이 괴롭다고 하는데... 라며 연구원을 쳐다봅니다. 연구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괜찮다고 계속 하라고 합니다. 충격 수준을 더 높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인제 3단계에서 4단계, 5단계로 조금씩 높여갑니다. 학습자는 인제 괴롭다고 소리를 칩니다. 쫌 괴롭겠는데 싶어 다시 연구원에게 이거 괜찮겠냐고 물어보니 살짝 웃으며 전혀 문제가 없을 뿐더러 실험을 계속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실험자는 이제 심장 상태가 좋지 않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도 연구원은 실험을 계속하라고 합니다. 학습자는 이제 실수가 오히려 더 잦아지고 있습니다. 아놔... 여러분도 괴롭습니다. 여러분은 방 너머에 있는 학생에게 말합니다. '야! 좀 잘 해봐! 내가 힘들다!' 학습자는 되려 큰소리를 칩니다. '아파서 더 못하겠어요! 여기서 내보내줘요! 당신은 날 여기에 붙잡아둘 권리가 없어!'
연구원은 묵묵히 충격 수준을 한단계 올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거 왠지 이러다가 저 사람을 해치게 될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연구원이 처음에 실험에 자원할 때 서명했던 서류를 보여줍니다. 이 실험을 최선을 다해서 임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내용이죠. 그리고 실험의 모든 결과는 자신들이 책임질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단기 자극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생명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얘기해 줍니다. 흠... 안다구 알아... 그러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충격 레벨을 높이게 됩니다.
어라, 그런데 300V가 벌써 넘었습니다. 이제는 스위치를 눌러도 학습자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왠지 기절한 것 같습니다. 아니.. 죽었나? 불안합니다. 그런데 태연하게도 연구원은 대답하지 않는 것도 틀린걸로 간주하라고 지시합니다. 큰일인데... 대답도 안하는데 어떻게 하냐고... 불안합니다. 몇번 스위치를 더 올려도 여전히 반응이 없습니다.
연구원을 쳐다보자 다시금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심하세요. 괜찮아요. 사실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고안되었답니다. 그리고 만약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100% 그것은 우리가 책임져요. 100%"
혹시나 모를 불상사가 생겨도 100% 자기네들이 책임을 지니깐 맡은바 미션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교사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여기까지 실험 얘기를 했습니다. 일부러 교사를 여러분이라고 가정하고 진행했는데, 여러분이라면 몇V까지 충격을 가하셨을까요? 220V전기만 살짝 흘러도 굉장히 고통스러운데 말이죠. 45V-100V 정도까지는 가능할까요? 아예 나는 전기충격 주는 것 자체를 거부할 거야 라고 생각하는 분도 더러 계실 겁니다. 밀그램은 40명의 심리학자들에게도 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평균 150V인 10단계에서 포기할 것이라는게 지배적인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다소 놀라웠습니다.
70%에 가까운 사람들이 450V라는 최고 수준의 전기충격을 가하는 마지막 30단계의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3명 중의 2명이 말입니다. 실험에서 330V에 이르렀을 때, 학습자가 자의식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도록 유도하였는데,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실험을 강행하시겠습니까? 절대 다수는 아니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험의 대조군의 결과를 보면 흥미롭습니다. 연구원이 이 상황에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대부분의 교사는 이 단계에서 실험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사에게 '너는 책임이 없다. 전적으로 이 실험은 우리가 책임진다.' 라고 얘기를 했더니 대부분이 실험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상황에서 권위자가 책임을 면책해 주는 행동을 할 경우, 사람은 최초의 지시가 불합리하고 상대방을 살상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위를 그대로 따른다는 겁니다. 양심의 가책을 뒤로 숨겨 버리고 말이죠. 면책은 권위자의 묵시적인 동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권위자가 꼭 사람이지 않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뭔가 이거구나 하는게 느껴지시죠?
마지막으로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더 얘기하고 이런 우리 사람의 마음이 인류사에 얼마나 큰 상처를 만들어 내는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스탠포드의 필립 짐바르도 박사는 일련의 자원한 학생들을 상대로 간수와 죄수 두 집단으로 나누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실험의 목적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어떤 형태로 소화해 내느냐를 보는 거였죠. 대학내에서 수행하는 모의 실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하였지만, 만약 학생들이 간수로서 역할을 할 경우 그들의 심리상태는 어떻게 변하는지, 죄수로 생활할 경우 그들의 심리상태는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를 면밀히 관찰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니깐 개인이 역할에 얼마나 몰입하게 되는지를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실험은 불과 며칠만에 종료되고 말았고, 학생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후유증을 남기고 말았답니다. 불과 이틀만에 폭동이 발생했고, 3일만에 교도소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았고, 4일만에 감옥은 통제불능의 아비규환 상태로 빠져 버렸습니다. 5일째는 감옥 내에서 성적 학대까지 발생했습니다.
상당히 위협감을 느끼도록 연출한 간수의 창의적 행동
http://www.skeptic.com/eskeptic/07-04-04.html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평범한 학생들이었죠. 그런데 감옥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시작하자 간수의 경우 상상치도 못한 사악한 고문 방법을 발명해 냈고 죄수들은 살의를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간수는 심지어 성적 고문은 물론이고 소화기로 피부가 얼어붙을 듯 차가운 이산화탄소를 퍼부어대며 괴롭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사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될 것입니다. 머리에 봉투를 씌워놓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 이 사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으세요? 이 사진은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감옥의 사진 아냐? 하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바로 미군의 이라크전 때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발생했던 학대 사건의 사진들과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스탠포드 감옥 실험의 사진들과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의 사진들... 아무리 비슷하다고 해도 너무나 닮아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중요한 점은 포로를 학대한 군인들이 과연 기질적으로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본국에서 너무나도 착하고 인정 많은, 법 없이도 살 수 있었던 착하디 착한 학생들이었거나 시민이었습니다. 진상조사위원회가 열려서 이들의 삶을 샅샅이 훑어봐도 그들은 그야말로 평범하고 선하디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평범한 사람을 이렇게 악마로 만든 것일까요.
지금까지 우리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큰 축이 되는 세가지 실험을 설명드렸습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다양하고 깜짝 놀라는 실험들도 많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짐바르도 박사가 쓴 루시퍼 이펙트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책 서문을 읽고 몇번이나 눈물을 흘리기 까지 했습니다. 이토록 인간이 잔인해 질 수 있구나,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영화를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잔인한 악마가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합니다. 이 실험들의 공통점은 어느 개인의 사악함과 잔인함은 기질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벤두라 실험은 사람에게 악의적인 소문을 흘리는것만으로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사람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밀그램의 실험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불합리하기 짝이 없더라도, 그 책임을 본인이 지지 않을 경우에는 권위자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의 복종 심리에 관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명령일지라도 말입니다.
살인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며 사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퇴근하고 싶어도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시간 보내기나,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행동들... 분명 불합리함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우리는 거기에 저항하는데 상당한 스트레스를 느낍니다. 살인과 퇴근하려는 임직원들을 비교한다는 것에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의 힘은 누군가 명시적으로 얘기하지 않더라도 개인을 꼼짝 못하게 할 정도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교내 폭력 사태에서 보듯이 학생들은 어째서 자신의 친구들을 이토록 잔인하고 집요하게 괴롭혔던 것일까요. 군대 내에서 학대를 받는 병사들을 왜 동료들은 그렇게도 모른척 했을까요. 특히나 개인의 인격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성적 학대는 심각한 범죄인데도 말입니다. 몇 명만이라도 강력하게 문제를 삼았더라면 그들이 과연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까 학교 문제지, 군대문제지 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부분이 문제인 것입니다. 남양유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사원이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분에 대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서슴치 않고 해대는 모습. 도대체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남양유업에 입사를 했던 것일까요.
개인이 죽을 수도 있음을 인지했음에도 괴롭힘을 멈추지 않았던 것, 그리고 그것을 말리지 않았던 것. 짐바르도 교수의 스탠포드 감옥 실험에서 그것의 실체는 극명이 드러납니다. 선한 사람조차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시키지도 않은 창의적 방법을 동원해가며 사악한 행동을 일삼을 수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 실험. 우리와 함께 생활하는 선생님들, 친구/동료들, 상관들. 그들이 악질이거나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되면 자연히 생기는 모습인 것입니다. 갈등과 폭력은 보이지 않는 고스트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 세가지 실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개인'이 시스템의 뒷면으로 숨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즉, 상황과 시스템이 우리 자신의 '책임감'과 '이성의 기능'을 마비시켜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담하건대 남양유업, 포스코 에너지의 문제의 인물들은 회사에서 말로 할 수 없는 성과실현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업의 구성원들은 매출 목표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 대우를 받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똑똑한 동물이라고요? 동시에 동물적인 수준의 감정적 사악함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속에서 나온 악마. '루시퍼'의 형체이기도 합니다. 즉, 루시퍼는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나요. 천사가 보이세요, 악마가 보이세요...
지금 이 세계가 전쟁과 이념의 갈등이 최소화된 상대적인 평화로움을 영유하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실은 인류사에 유래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대량살상의 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정부의 살인 명령에 의해 군인이나 민간인이 사람을 죽인 건수만 5천만명이 넘습니다. 1915년부터 오스만투르크는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을 살해했습니다. 알다시피 20세기 중반에는 나치가 살해한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천만명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무려 600만명의 유대인과 300만명의 소련군 포로, 그리고 200만명의 폴란드인이 이 안에 포함됩니다. 스탈린의 소비에트 정권은 2천만명의 러시아인을 숙청했습니다. 자국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오쩌둥은 심지어 자국민 3천만명의 살해했습니다. 크메르 정권은 170만명의 국민을 학살했고,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은 이라크 쿠르드인이었던 시민들 10만명을 죽였습니다.
르완다에서는 같은 민족이었던 두 종족 사이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강간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웃이었던 후투족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투치족을 제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불과 석달만에 투치족 인구의 4분의 3이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여자들은 반드시 강간을 하고 난도질을 하거나 산채로 불에 태워서 죽이도록 지시를 했습니다. 이웃이 이웃을 죽이는 끔찍한 일들이 매일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20만명의 여자들이 강간 후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 살육을 당해야 했습니다. 동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 선생님은 이렇게 증언을 했습니다.
'하루종일 사람들을 죽이느라 지쳐서 여자들을 강간할 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가솔린을 병에 담아 와서 여자들에게 뿌리고 불을 붙였습니다.'
후투족의 한 아이 엄마의 증언은 어이가 없습니다. 일생동안 친구처럼 지내던 이웃의 아이들을 잔인하게 때려죽였는데, 어짜피 부모가 모두 살해되어 오갈데 없는 고아가 된 만큼 그 아이들을 죽인 것은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는 말을 진심을 담아서 하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나와 매일 같이 생활하던 이웃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배를 갈라 내장을 쏟아내고 산채로 불을 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창으로 몸을 뚫어 매달아서 죽을 때까지 고통을 느끼도록 할 수 있을까요? 임신한 산모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 잔인하게 도륙해 버리고 엄마도 토막내 버린채 죽이는게... 과연 상상으로라도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끔찍한 예는 겨우 서막에 불과할 정도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믿어지세요? 과연 이런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는게 믿을 수 있을까요?
거듭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상황의 힘'과 '시스템의 힘'입니다. 거대한 사회 조직이, 매스 미디어와 여론, 그리고 그 속에 속한 익명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악마의 모습들,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책임감을 느끼고 마구 악성 루머를 퍼뜨리고 찾아가서 공격까지 하는 사람들. 내가 매일 만나는 나의 친구들은 이렇게 사랑스럽고 착하고 좋은 사람들인데... 우리 개개인들이 모인 사회의 모습은 이처럼 무책임하고 무감각하고 사람을 자살로 몰고가는 잔인성까지 보이는 모습이라니 수긍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면 뭔가 해결책은 없는걸까요? 한번에 쉽게 만들어질리는 없지만, 솔루션 역시 '상황'과 '시스템'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그저 재발방지책을 마련해서 경찰을 배치하거나 사건 전초 가능성 단계에서 형사적 접근을 만들자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지속적인 에너지가 들어가는 방식은 우리가 수없이 보아 왔듯이 일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근육에 계속해서 힘을 줄 수가 없듯이 자연스러운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희망은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에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음에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사람을 구하거나 도와주는 영웅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영웅의 모습 역시 개인적인 기질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지만, 짐바르도는 영웅 역시 상황과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한 측면으로 보는게 설득력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무엇이 사람을 악마로 만드는가에서 무엇이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무엇이 우리 사회를 보다 더 긍정적이고 보다 천사의 측면으로 돌아서게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짐바르도 박사는 사람이 상황에 굴복하면서 갖게 되는 부작용 중의 하나이자 반드시 극복해야 할 요소중의 하나로 '왜곡된 시간인식'을 꽂고 있습니다. 사람의 성격이 변해 버리고 포악해 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본인이 인식하는 시간이 '현재 이 순간'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학교 다닐 적 여러분이 꽤나 고생했던 숙제나 텀 프로젝트, 시험과 같은 절대절명의 마감기한이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세요. 회사의 과제 일정, 양산 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데드라인 내에 과업을 완수하기 전까지 여러분은 다른 걸 생각조차 못합니다. 밤을 새서라도 반드시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이 상황에 누가 어디 바람 좀 쐬러 가자거나, 고민이 있으니 얘기 좀 들어달라고 하거나, 술 한잔 하자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리 만무합니다. 정공법으로 노력해서 해결하든, 친구의 것을 카피하든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극복을 하려고 듭니다. 제발 이것만 끝나면 좀 쉬어야지... 라고 하지만, 끝나는대로 바로 뒤이어지는 또다른 것이 기다리고 있죠. 초등학교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그리고 군대, 회사... 여러분, 다들 이런 데드라인의 압박에 시달리며 살지 않으셨나요? 학생도, 선생님도, 군인들도, 사회도, 모두들 이건 아닌데 하는 상황 속에 처했을 때도 자신이 빨리 완수해야 하는 일에 매몰되면 자기 코가 석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상황의 힘에 시달리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미래'에 관한 인식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학교 입학 때라던가 입사 후 연수때... 지금부터 5년 후의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그려보라는 질문을 받으신 적 있지 않으세요? 그때 뭐라고 쓰셨나요. 그 꿈이 무엇이었든 간에 여러분은 5년 후의 미래에 나는 무엇을 하고 살면 좋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셨겠죠. 잘 떠오르진 않아도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미래에 무엇을 할지 그려보며 살고 계시나요? 당장 오늘 하루, 이 한주의 일도 모르겠고... 다른건 모르겠다라고 하신다면 확실히 상황의 힘에 압도당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현재의 내 상황을 가늠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한경쟁의 위협 속에서 기업은 직원들을 단순히 짧은 제한 시간내의 매출 실현에 매몰시키지 말고 그들 각자의 미래 행복 실현을 위한 비전이 무엇일지를 늘 고민하고 생각하게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내가 이 조직에서 달성하고 싶은 개인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자주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조직의 익명성 속에 숨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마감기한이 지나는 순간, 민간인이 되고 평범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복귀합니다. 그리고 선량한 시민으로 변모합니다. 그러나 마감기한 동안 군대는 상사로 하여금 간수가 되도록 하고 후임병을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는 죄수로 취급하는 문화를 만들었고 그것을 지지하는 권위자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상명하복의 문화에는 그 자체로 루시퍼 효과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일정 시간동안 사람을 훈련시키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함께 미래를 바라보며 협력할 수 있는 형태의 문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상사에게 복종하려고 군대를 가는 것도 아니고, 관리되려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스스로를 책임감 있고 결단력 있는 강한 남자를 만들기 위해서지 않습니까.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가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친구와 함께 있는 여러분에게 유명한 연예인이 다가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반갑게 인사하고 싸인도 받고 이런저런 질문을 주고 받을 것입니다. 상대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친구와 함께 있어 대화를 하는데는 그닥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친구가 갑자기 전화가 와서 자리를 떠 버립니다. 그러면 급격히 대화가 어색해지고 불편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저 사람대 사람인데 왜 이렇게 불편해지는 것일까? 서로 잘 알지 못해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의 친구가 다시 돌아오면 그전의 불편했던 감정은 사그러집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보이지 않는 힘의 균형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잘 느끼지 못하지만 개인과 개인의 만남, 개인과 집단의 만남, 집단과 집단의 만남간에는 보이지 않는 균형의 조화가 존재합니다. 방금 든 예처럼 상대적으로 유명하거나 권위가 있는 사람에게 다가갈 때는 두명이면 적당합니다. 그런데 세명이 다가가면 이번에는 상대가 불편해집니다. 뭔가 모르게 둘러싸인 느낌이고, 왜 나를 이렇게 떼지어서 찾아온거지? 하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상황의 힘을 극복하는 방법은 역시 상황의 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힘의 균형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누군가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것을 멈춰달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혼자서는 쉽지가 않습니다. 두 명이서도 쉽지 않습니다. 상대가 도리어 화를 내며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세명이 다가가서 얘기를 해야 합니다. 세명이 다가가면 상대는 위협감을 느끼게 되고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게 됩니다.
고립된 사회를 조직할 때는 이런 힘의 균형이 한쪽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불합리한 상황의 힘을 깨기 위한 조화의 균형을 위한 문화나 제도를 충실히 마련해야 합니다. 조직을 대할 때 개인이 홀로 서서 대해야 하는 상황을 개선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미국의 개인을 변호하는 변호사 제도는 그래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변호사 제도를 도입하자는 말이 아니라 홀로 시스템을 상대하도록 방치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개인은 시스템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가혹행위 가해자는 피해자에게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얘기한 말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비극의 해결책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참담한 사건이 터질때마다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고,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전혀 본질에 닿지 않는 접근입니다. 개인들이 루시퍼의 악마에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것,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라고 저는 봅니다.
마지막으로 짐바르도 박사의 루시퍼 이펙트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짐바르도 박사의 평생의 고민과 열정이 담긴 이야기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이들이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할 이야기를 전합니다. 짐바르도 교수는 현재 Heroic Imagination Project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악마가 아니라 영웅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상황과 시스템을 일깨우고 이를 확산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동참하지 않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