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물의 길(2022)
두려움,
인간으로서의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 아파트들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 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아바타: 물의 길>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황현산 선생의 글을 떠올렸다. 나는 카메론 감독이 꽤 성의 없게 인간의 파괴적 본성을 비판했다고 생각한다. 이 '성의 없음'은 허술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굳이 말을 얹지 않아도 카메론은 세계 영화사에 여러 번의 획을 긋고 채색까지 입혔다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니. 그런 그이기에, 공들여 만든 인간과 자연의 대서사라는 무대에 굳이 교묘한 비유를 더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만든 무대와 공간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악'이다.
인간의 악은 망각에서 비롯된다. 타인의 세계를 침범하고 파괴했던 과거는, 피아를 타자화하고 존재했던 시간과 역사를 왜곡하는 현재를 발판 삼아 유물이 되어버린다. 상대는 영원히 파괴된다. 선생의 말처럼 과거는 그렇게 착취당한다. 이처럼 인간의 악은 망각에서 비롯되고, 또 망각으로 완성된다. 카메론이 비판한 파괴성의 주체는 제국주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어느 아시아 국가일 수도,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던 서방국일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생명을 경시하는 인류 그 자체이다.
아바타의 드넓은 세계관이 인간 대 자연, 혹은 이종 간의 대립으로 비화 될 때 나의 현재는 용산과 이태원, 그리고 누군가 '강제동원 해법'이라 칭한 어느 뉴스 지면의 꼭지에 머물렀다. '깨달음'이나 '반성'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인간의 의식은 사실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히틀러의 패망이 없었다면 그의 조국도 사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이제까지의 삶을 더 이상 안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거나, 무가치하고 몰염치한 전범국으로 세계사회에 낙인찍히리라는, 시대에 걸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 몫의 결정과 선택을 갈망하다가도 어려워한다. 그런 이들이 택한 대안은 두려움에 지배되는 것이다. <자유론>과 <군주론> 사이의 간극에 '아바타'를 놓아보며 내가 얻은 결론은 이렇다. 인간이 선하든 악하든, 합리적이든 본능적이든, 그들에게 부재한 것은 책임감이다. 스스로의 삶에 대해, 타인에 대해, 아름다움에 대해. 예컨대 '합리적 이기성'은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 절대 군주에 대한 피지배를 받아들이는 일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책임감이 부재한 것이다.
따라서 나비족이 자연의 편에 섰다고 해서 절대 선일 수는 없다. 영속적 존재로 묘사되는 에이와는 그들의 두려움이다. 종족의 투철한 사명은 두려움의 발로였을 것이다. 반면 문명의 비호를 받는 인간에게 두려움은 부재했다. 그렇게 내면의 악은 이 푸르고 아름다운 행성이 쏟아져버렸고, 대립과 파괴는 아마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카메론이 공들여 만들어 낸 세계 안이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나의 세계든 말이다.
반성을 위해 두려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신마저도 죽였으니, 누가 이들의 두려움이 된단 말인가. 나는 그저 내가 인간인 것이 두렵다. 끝없이 잃어왔던 한스러운 나라의 국민인 것이 두렵다. 나비족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학살당하고 그들의 대지를 내어줄 뻔했다. 우리는 무엇을 내어주려 하고 있는가.
-Avatar_ The Way of Water (2022)
-사진출처: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