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한줄평
★★★★☆ (4.5/5)
완전한 가식도, 완전한 순수함도 인간의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줄거리
주인공 오바 요조는 어릴 때부터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인간 사회에 대한 두려움과 소외감을 느낀다. 그는 타인에게 순응하는 익살꾼 역할을 하며 내면을 숨기고 살아간다.
청년이 된 요조는 도쿄에서 생활하며 여성들과의 관계, 술과 마약 등에 빠져 점점 타락해 간다.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하고, 타인의 도움으로 잠시 안정을 찾기도 하지만 다시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결국 요조는 정신병원에 수용되며, 가족과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살아간다. 그는 자신을 “인간으로서 실격되었다”고 결론짓는다.
책장
27 p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91 p
“어쩄든 여기에도 나를 위협하는 끔찍한 인간이 있었구나. 타인. 불가사의한 타인. 비밀투성이 타인. 시게코의 얼굴이 갑자기 그렇게 보였습니다.”
92 p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131 p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151 p
이제 이 사람도 내리막길이구나. 하루를 더 살면 더 산 만큼 천박한 추태를 보이게 될 뿐이다. 꽃은 시들기 전까지가 꽃인 것이다. 아름다울 때에 잘라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분을 제일 사랑하고 있는 것은 나야. 남들이 아무리 미워해도 상관없어. 하루라도 빨리 저분을 죽여드리지 않으면 안 돼 하고 저는 이 괴로운 결심을 점점 더 굳혔던 것입니다.
독후기
이 글은 자살의 행위를 경계하며 다자이 오사무가 전후 일본 청년에게 구원의 상징처럼 여겨지며 잇다른 자살을 추동한 데 대한 비판적 의식을 드러냅니다. 첫째로 요조의 ‘가식 없음’과 ‘가식에 능하지 못함’을 인간 사회에서의 열위의 조건으로 해석했으며, 둘째로는 저 자신이 크리스천이므로 그가 가롯 유다를 도입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종교적 은유로 설득하는 시도 또한 의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작가의 인정욕, 사회적 맥락, 도덕적 책임까지 고려하며 다자이를 절대화하지 않고 균형있게 비판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스스로도 경도된 측면이 있기에 여러분들이 근거의 합리성과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작위와 위선
27 p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책장을 펴고 글을 읽는 순간부터, 작두에 올라탄 것만 같았다. 단 한 줄이라도 잘못 삼키면 칼날에 베일뿐 아니라 암담한 저 밑으로 떨어질까 봐 겁이 났다.
사람은 일기를 쓰는 순간조차도 타인에게 읽힐 것을 염두에 둔다. 마치 자신의 삶이 언젠가 타인에게 읽힐 텍스트라도 되는 양 의식하며 살아간다. 두 번은 오를 수 없는 무대를 앞에 두고, 배우의 시선은 무대와 관객 사이 어디쯤을 끊임없이 배회한다.
요조가 관계를 맺는 인물들은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길 원하며 우위에 서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익살꾼을 자처하며 열위에 섬으로써 인간의 ‘작위(作爲)’를 포기한다. 그가 인간이 두렵다고 느낀 까닭은 그러한 작위 안에 감추어진 욕망과 어둠을 본 까닭이다. 그는 그들과 동화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순결이나 정인을 도둑맞아도, 교활한 친구의 조소에도 화를 내지 못한다. 가식과 셈에 능하지 못한 까닭에 그는 인간 실격의 초입에 들어선다.
실격을 실격하다
91 p
“어쨌든 여기에도 나를 위협하는 끔찍한 인간이 있었구나. 타인. 불가사의한 타인. 비밀투성이 타인. 시게코의 얼굴이 갑자기 그렇게 보였습니다.”
131 p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교활할수록, 가식에 능할수록 더 인간적이라는 세상의 법칙을 두려워하지 않고, 박제된 글로써가 아니라 삶으로써 나약한 자신을 드러내었다면 요조나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답게 살고 인간답게 죽었을 것이다. 실제 그러했으리라는 추론은 차치하고, 그가 <직소(直訴)>에서 묘사한 가롯 유다는 너무도 순수하고 악한 인간의 결정체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지옥을 믿었으나 천국과 신의 사랑을 믿지 못했다. 그렇기에 가롯 유다를 도구 삼아 자신을 위한 변명을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의 아름다움을 흠모했기에 그를 팔았다는 역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구원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예수는커녕 단 한 명의 사람도 믿지 못했으므로 그의 죽음 또한 타인과 결부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윤리관이 전초된 패전 후 일본에서 다자이 오사무가 실격된 인간성을 내세우고 자살함으로써 시대를 고발했다고 할지라도 그 또는 그의 작품이 시대의 구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성한 정신의 죽음일지언정 그의 죽음이 무엇을 대속하였는 지도 불분명하며, 그가 타인을 위로하고자 자신을 인간으로부터 실격처리했는가 묻는다면 어림없다. 애초에 그는 아쿠타가와상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있었으며 이는 인정욕과 결부된다. 그가 요조와 다르게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 인간적인 행위를 보였으므로 그는 ‘인간 실격’의 자격으로부터 실격이다.
요컨대 다자이 오사무가 풀어낸<인간실격>의 주제의식과 이를 이끌어낸 헝클어진 문체를 나는 사랑하지만, 그가 자살했으므로 그와 요조 모두를 긍정할 수 없어졌다. 가식을 부려서라도, 교활한 몸짓을 거듭해 알을 깨고 선과 악을 진자처럼 오가며, 환희와 낙담을 희락과 상실을 거듭해 인간으로 살았어야 한다.
물론 그의 파멸은 그저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가식 없는 순수함이 끝내 살아남지 못하는 사회, 교활함과 작위가 인간됨의 조건이 되어버린 시대에 대한 냉혹한 고발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인간으로 살려는 몸부림을 멈췄고, 구원을 믿지 않았기에 그마저도 하나의 ‘실격’으로 남는다. 그는 예수가 아니며, 전란의 구원자도 될 수 없다. 따라서 그를 통한 칭의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완전한 가식도, 완전한 순수함도 인간의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는 그저 완연한 사랑을 갈구했던 가여운 인간이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