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집난 삶의 투쟁

파과 - 구병모

by 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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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 구병모 장편소설


한줄평


★★★☆ (3.5/5)


세대에 걸친 갈등과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각자의 삶에 존재했던 시대성과 그로 인한 양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절대적인 명분과 자세를 잃지 않는 데 있다. 그렇기에 나는 청년으로서 지난 세대로부터 약속된 양보를 받기보다, 삶에 대한 열정과 각오를 그들에게 먼저 약속하며 인정과 응원을 이끌어낼 의무가 있다. 이는 비단 나의 삶뿐만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이다.


줄거리


조각, 본명을 잊은 지 오래된 60대 여성은 평생을 ‘방역’이라 불리는 청부살인으로 살아왔다. 냉철하고 효율적인 킬러였던 그녀는 이제 기억이 흐릿해지고 몸이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을 ‘퇴물’이라 여기며 서서히 삶의 끝을 받아들인다. 어느 날, 새로운 의뢰를 앞두고 한 의사의 딸을 만나게 되면서 조각은 예상치 못한 감정의 파동에 휩싸이게 된다.


무언가를 지키고 싶은 욕망, 유기견 무용에게 느낀 연민, 살인을 의뢰한 이들의 슬픔과 후회, 그 모든 감정이 조각의 삶을 조금씩 흔들기 시작한다. 킬러로서의 무표정한 일상이 ‘사람’에 대한 기억과 상실로 차오르며, 조각은 차마 말하지 못한 감정을 안은 채 누군가의 삶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생의 마지막에서야 인간다움을 되찾은 한 인물이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이다. 노화, 연민, 유년의 상처, 타인을 향한 책임감은 세대를 넘는 감정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그 안에서 조각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세’를 증명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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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p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연민이라니, 삶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96 p

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 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130 p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함이 확실해지자 그의 몸 한 귀퉁이에서 약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시절과, 그것을 이루거나 부순 몇몇 장면들이 요동하며 그의 눈꺼풀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131 p

끌어당겨 손가락에 감아보고 싶었던 머리카락 대신, 거기엔 푸석하고 건조하며 구불거리는 잿빛 머리카락이 손 닿지 않는 선반 위의 해묵은 먼지처럼 뭉쳐 있었다. 그것은 기억과 호환되지 않는 현재였고 상상에 호응하지 않는 실재였으며, 영원히 괄호와 부재로 남겨두어야만 하는 감촉이었다.


227 p

검은 양복을 입고 흰 띠를 팔에 감은 그의 어깨, 곧은 등과 다리를, 내내 바라봐서 미안합니다. 그 어깨에 손을 얹어보고 싶어서, 등에 뺨을 대어보고 싶어서, 아니 그 모든 것들을 하기 원한다는 열망보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감촉을 상상해보아서, 미안합니다.


323 p

피가 튄 그의 얼굴은, 이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일도 처음이지만, 유년기에 미처 충족시키지 못하기라도 한 듯한 악의나 장난기 그리고 비밀스러움으로 빚어져 있다.


후기

이따금씩 언어를 창조하곤 한다. 적확한 단어를 찾지 못해 ‘타자성’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티자성(他者性)이 아닌, ‘타인과 얽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어진 감정’이라고 해석해 주길. ‘연민’이라 쓰려 했으나 감정의 농도가 딱 들어맞지 않았다. 감히 족보도 없이 언어를 창조한 행위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면 당신 말이 무조건 맞으니 미안하다.


인간성


179 p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연민이라니, 삶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그 일관성 없음은 ‘인간성’에서 비롯된다. 그녀 또한 인간이었으므로 생의 끝에 사고처럼 마주한 타자성 자신에게는 어색했을지언정 인간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늦게 배운 걸음마나 언어처럼.


삶에 대해, 더 열정적이거나 뜨거울수록 잃을 게 많아지지 않나. 그러나 우리는 상실을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괜찮다. 잃을수록 잃어갈수록 더 잘 살아내는 것이다.


삶의 명분

구병모 작가가 밝혔듯 책의 제목인 ‘파과’는 다의어의 실체를 규명하지 않기 위해 한글로 쓰였다. 그래서 열여섯의 소녀(破瓜)는 살인을 배움으로써 타자의 세계에 진입했고 흠집 난 과실(破果)처럼 으스러진 나이가 되어서야 타자성을 갖는다. 영화의 문법과 다르게 소설은 제목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조각의 감정과 인물 간 대립에 대한 분명한 논증을 피한다. 얼핏 사랑인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의 실체와, 세대가 맞부딪친 전쟁에서 각자의 명분에 대해서 그러하다.


일생 두 번 간직한 사랑의 감정은, 차마 표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노년의 삶에 분출된 가장 강력한 욕망의 감정은 타인의 삶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작가와 소설의 약속은 조각이 강 박사에게 가졌던 감정의 실체를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이는 투우가 조각에게 가졌던 그것과 비슷하리라. 단 한순간의 파동이 생을 덮칠지라도 삶은 원래 그러한 것이며, 예기치 못했을 감정에 휩쓸리는 것 또한 지극히 인간다움이다.


물론 그 파동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단편적인 해석일지 모른다. 바다의 윤슬을 보고 불현듯 멈춰 서듯이 강 박사의 딸을 보고 조각이 느낀 충격과 그 이후의 행보는 논증할 수 없는 영역이다. 어린 소녀의 삶을 지키기 위해 으스러져가는 자신의 생을 제물로 삼았다. 논리적일 수 없으나 너무도 아름답고 완벽한 명분이다.


실낱같이 이어오던 살인자의 생애에는 명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류의 유지와도 같은 법칙만이 존재했다. ‘모든 역량을 다해 바닥을 구르는 마른 낙엽 같은 인간들을 살해’하는 것. 영화의 방점은 ‘바닥을 구르는 마른 낙엽 같은 인간들’에 찍혔으나, 소설의 방점은 ‘살해’에 있다. 조각은 정의로움과 거리가 멀었고 그저 최선을 다해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으로 단출한 삶의 법칙을 세웠다. 죽거나, 죽이거나 하는 무한한 단순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법칙을. 그러나 아리도록 달콤한, 소녀의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이 법칙은 파훼되다 명분이 들어선다.


세대 전쟁

투우의 명분은 격하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그 또한 소녀와 같이 넥타같은 생명을 지닌 소년이었다. 최초의 살인을 기점으로 류를 욕망했고 죽은 그의 아내에게 죄책감을 떨치지 못했던 조각은, 투우의 삶을 추동한 감정의 화신과도 같다. 소년은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살인자이자 친절한 구원자였던 그녀를 욕망했다. 조각은 이 욕망에 책임이 있다.


파종할 수 없었던 마음은 세대를 걸쳐 비극으로 치닫는다. 조각의 이행해야 하는 책임이란 그저 그녀가 투우를 기억해 내는 것뿐이었는데, 이마저도 해내지 못한다. 살인의 목록을 도열하지도 남겨진 이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던 그녀에게 그 소년은 특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마지막 숨과 맞바꾼 끝 지경에서 중얼거리듯 소년의 존재를 토해낸다. 알약을 삼키지 못해 가루로 빻아줘야 했던 그 어린 소년을.


지난했던 두 살인자의 대결은 더 젊은 쪽이 명을 다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자연스럽게 노년의 살인자는 연장된 삶을 얻는다. 그러나 이는 연명이 아닌 명분의 승리이다. 조각의 투쟁에는 삶이 있었고 투우에게는 타인의 삶에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삶에 한정 짓자면 명분은 조각에게 있었다. 치열한 다툼 끝에서 삶의 당위성을 거머쥔 그녀가 살아남았다.


이처럼 세대에 걸친 갈등과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각자의 삶에 존재했던 시대성과 그로 인한 양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절대적인 명분과 자세를 잃지 않는 데 있다. 그렇기에 나는 청년으로서 지난 세대로부터 약속된 양보를 받기보다, 삶에 대한 열정과 각오를 그들에게 먼저 약속하며 인정과 응원을 이끌어낼 의무가 있다. 이는 비단 그들의 삶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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