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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19. 2021

혁명의 저녁_2

성공이든 실패든 중요하지 않은 나의 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친 혁명가가 숨어들기 좋은 저녁이다. 은신처는 언제나 서울숲 연못가 벤치였다. 벤치 밑에 주먹만 한 사료 봉지 서내 개를 밀어 넣고, 운동화를 벗고 발바닥을 꾹꾹이 했다. 허리를 펴자 척추 뼈가 우두두두 투덜댔다. 고개를 들면 우뚝 솟아 있는 아파트가 보였다. 한 달 관리비가 200만원이 넘게 나온다는 갤러리아포레아파트. 그냥 살라고 해도 엄두가 안 난다. 갤러리아포레와 내 집은 100미터 거리에 있다. 내 집은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30만원, 관리비는 1만원이다. 갤러리아포레에 사는 사람은 바퀴벌레 득실대는 지하에 사는 내가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아무렴 상관없다. 내 두 평짜리 방엔 밤마다 광활한 우주가 찾아오니까. 풀잎들이 흔들리며 서로 몸을 비볐다. 나는 눈을 감고 오직 청각에만 집중해 살아있음을 느꼈다. 노인들의 무심한 수다와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겹쳤다 멀어졌다. 나는 양반다리로 앉아 붕어빵을 꺼냈다.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내일 사무실에 나가면 사장이 현금으로 오늘 일당 3만원을 준다. 부디,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이 말만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같은 늙은이에게 일을 주는 총알대출 사장과 조카가 고마울 뿐이다. 돈이 생기면 10킬로그램짜리 사료를 사고, 고양이 구내염약을 사고, 건식사료 못 먹는 양말이를 위해 습식 캔도 사야겠다. 돈이 남으면 열량 높은 맥도날드햄버거를 사먹어야겠다. 3개는 먹어야 배가 빵빵해질 텐데, 요즘 부쩍 살이 빠졌다. 쏴아, 쏴아아. 바람이 분다. 땀이 밴 살갗에 바람이 달라붙는다. 이맘때 부는 바람엔 수분이 섞어 있다. 몸이 더 무거워진다. 덧없는 하루가 끝나가고 있다.      


새다. 새가 눈에 걸린다. 목이 길고 가는 새, 새는 고고하다. 뼈와 가죽만 남은 나, 나는 초라하다. 새는 도도하고 나는 욕되다. 울렁이는 시선에 새가 콕, 박혔다. 배경은 사라지고 새만 남았다. 새의 윤곽선이 또렷해졌다. 새는 물에 발목을 담근 채 굳어버렸다. 살을 파내 방부제를 채우고 깃털에 기름칠을 한 박제(剝製) 같다. 새는 그 자세 그대로 수면을 응시하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새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입을 다물고 붕어빵을 씹는다. 이빨끼리 부딪치는 소리도, 오물거리는 소리도 내면 안 된다. 새는 혁명중이다. 새를 방해하면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나도 박제가 된다. 겹겹이 늘어진 눈꺼풀이 하나로 뭉친다. 중력을 버틸 힘이 없다. 나는 지퍼를 채우듯 눈꺼풀을 닫았다.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죽은 듯이 살면서 하루, 하루를 연명하며 시간을 죽였다. 보이는 모든 눈빛이 나를 욕했다. 욕하는 눈빛을 벗어나는 길은 죽음뿐이었다. 죽어야 끝나는 치욕이었다. 죽어도 끝나지 않을 비참이었다. 살아있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기억과 싸우는 시간은 지옥이었다. 나는 밤마다 사람들 눈빛을 피해 강가를 걸었다. 내 뒤를 좇는 암살자의 발짝 소리에, 휴대폰 플래시를 켜 그 소리를 비추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푸른 눈빛과 만났다. 나를 비난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푸른 눈빛은 피하지 않았다. 또렷해지고 선명해졌다. 드디어 내 마지막을 함께할 저승사자가 왔다. 나는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어서 고통 없이 끝내달라고 두 손을 모아 애원했다. 야아아아아옹. 소리가 다가와 손등을 핥았다. 전율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까끌까끌하면서 부드러운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겁 없는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부끄러운 내 손을 희롱했다. 야릇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고양이는 손바닥을 핥아주지 않았다. 내 뺨에 얼굴을 비비며 꼬리를 세우고 갸르릉, 갸르릉, 괜찮아, 살아도 괜찮아, 노래를 불렀다. 나는 눈을 끔벅이며 고양이와 눈을 맞추었다. 고양이도 눈을 끔벅했다. 가슴 저 밑에서 뜨거운 뭔가가 올라오다 목구멍에 걸렸다. 나는 그것을 꿀꺽 삼켰다. 화산이 폭발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늙은이의 울음처럼 바보 같은 건 없다. 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두 눈을 주먹으로 누르고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고양이가 젖은 뺨을 계속 핥았다. 너무 간지러워 웃음이 터졌다. 나는 울다가, 웃다가, 마침내 미친 듯이 살고 싶어졌다.     


찰칵, 찰칵. 누가 실패한 내 인생을 기록하나. 인간극장, 추적60분, 그것이 알고 싶다. 예능이면 몰라도 다큐는 싫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스크를 끌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어린 학생이 자전거를 세우고 휴대폰을 꺼내 새를 찍고 있었다. 나는 새를 본다. 새는 꿈쩍도 않는다. 숨도 쉬지 않는 듯 미세한 움직임도 없다. 새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다. 새는 성공할 때까지 어떤 어려움도 참아낼 것이다. 새는 실패를 모르는 혁명전사다. 매일 지우고 싶은 기억을 뒤적이며 한탄하는 나보다 위대한 혁명가다. 나는 손을 맞잡고 새를 본다. 손바닥에 땀이 배고 온기가 돈다. 학생이 돌을 던졌다. 학생은 움직이지 않는 풍경이 재미없었을 것이다. 학생 그러지 말거라. 새는 지금 혁명을 하고 있단다. 새에게 시간을 줘야 한단다. 나는 입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을 오물거리다 삼켰다. 물살이 일어 새의 발목을 간질였다. 새는 한쪽 다리를 접어 올려 살아있음을 알렸다. 물결이 잦아들자 새는 아주 천천히 다리를 내려놓았다. 새는 도망가지 않는다. 피라미라도 한 마리 잡아, 먹고 살겠다는 새는, 이유 없는 괴롭힘을 견디며 생을 이어나가고 있다.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다. 새는 생을 걸고 혁명을 하는 중이다. 시간이 무거워지고 있다. 저녁이 깊어지고 있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결코 멈출 수 없는 혁명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애가 녹는다. 성공과 실패는 새의 선택에 달렸다.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는 박제가 되어 새의 혁명을 기다렸다. 자전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 앞을 지나갔다. 눈을 뜨고 현실을 버티고 싶은데 눈이 감겼다.     


정숙아, 말이 돼? 맘 주고, 몸 주고, 돈까지 줬는데. 그 새끼가, 딴년한테 갔다고.

새된 목소리에 눈을 떴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뜨고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십 대 중반의 여자가 사회적 거리 2미터만큼 떨어진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물고 뜯었다. 나의 존재는 여자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지금 자신의 감정에만 몰입해 있었다. 여자도 혁명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를 붙잡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여자는 소리치다가 훌쩍이다가 땅을 찼다. 흙먼지가 날렸다. 나는 새를 본다. 새는 그대로 있다. 새에게 여자의 슬픔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혁명의 성공을 기다릴 뿐이다.

야! 너, 나, 이해 못해? 죽고 싶다고. 미치겠다고.

휴대폰이 얼씨구절씨구 맞장구를 쳐주지 않는 모양이다. 여자는 빽 화내다, 풉 웃었다, 흑 울었다. 힘들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불혹이 지난 나이에 이별이 힘들어 죽고 싶다 울부짖을 수 있다니. 나는, 저 새처럼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사랑이 또 올 테니 힘겨워 말아요, 심리상담사가 돼주고 싶었다. 나는 배낭 앞주머니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마스크를 고쳐 쓰고 엉덩이를 들었다. 여자가 소릴 질렀다.

고소할 거야! 바람피는 한남들 다 매장시켜야 돼. 강간, 혼빙간음, 사기. 또 없냐?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나는 얼어붙었다. 저 늙은 남자가 나 강간했어요, 검지로 나를 지목하는 것 같았다. 나는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시선에 말뚝을 박고 정면을 응시했다. 새가 보인다. 새는 그대로 있다. 새는 포기를 모른다. 새는 혁명을 멈추지 않았다.     


여자가 돌을 던졌다. 새의 발 앞에 돌이 떨어졌다. 새는 움찔했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물결이 일었다 가라앉았다. 여자가 더 큰 돌을 집어 들었다. 손아귀가 두툼했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말했다.

하지 마세요.

여자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여자는 또 돌을 던졌다. 여자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더 큰 물소리가 났다. 새는 날아오르지 않았다. 물살을 견디며 그대로 있었다. 여자는 더 큰 돌을 집었다. 여자가 돌을 던지려는 찰나, 나는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해요. 새는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에요. 혁명중이란 말입니다.

혁명? 지랄하네. 지랄을 하세요.

여자가 욕했다. 나는 욕먹을 짓을 하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먹는 욕은 참을 수 있다. 잘못이 없는데 먹는 욕은 참을 이유가 없다. 나는 마스크를 눈 밑까지 올리고 꽤 오래 노려보다 쏘아붙였다.

혁명중인 새를 방해하지 말라 했다. 난 자네에게 욕먹을 만큼 잘못하지 않았다. 사과해!

여자 손목을 더 세게 잡았다. 뼈가 뼈를 물었다. 맥이 요동쳤다. 여자는 돌을 놓지 않았다. 힘주어 주먹을 쥐고 버둥거렸다. 새의 목처럼 가는 여자 손목이 부러질지도 몰랐다. 젤리처럼 여린 살이 밀리고 두부처럼 하얀 피부가 붉어졌다. 여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나를 흔들고 밀쳤다. 여자 손톱이 눈을 찔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여자는 내 마스크를 벗겨냈다. 발가벗겨진 얼굴이 부끄러움에 떨었다. 여자는 나보다 힘이 셌다. 나는 여자에게 졌다. 나는 새의 혁명을 지켜주지 못했다. 새가 내 무능을 욕할 것 같았다. 여자가 돌을 놓았다.

교수님, 교수님 맞죠?

나는 고개를 숙이고 끈 떨어진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아니다. 나는 교수가 아니다. 나는 여자를 모른다. 여자는 나를 알고 있다. 어쩌면 여자는 내 제자였을지도 모른다. 단 둘이 밥을 먹을 땐 허벅지에 손을 올렸고, 술을 마실 땐 손을 잡고 볼을 비볐다. 제자가 울먹이면, 올핸 등단해야지, 등을 두드리며 내 이름의 힘으로 억압했다. 등단이 꿈인 제자는 저항하지 못했다. 그 당시 나는 힘이 셌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어도 내 지위를 이용한 힘은 강했다. 제자는 등단했고, 그 후 제자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잘된 일이었다. 등단이 꿈인 제자는 많았다. 내가 밥을 먹자거나 술을 마시자고 했을 때, 거절하는 제자는 거의 없었다. 지금이었다면 미투에 매장됐을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벤치에 주저앉아 몸서리쳤다.     


이별여행이었다. 늦은 밤 46번 국도에 달리는 차들은 많지 않았다. 마지막이었기에 감정은 격해지고 차는 속도를 더했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차는 불안하게 달렸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그녀를 만졌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안전벨트도 풀었다. 내 요구를 받아줘야 끝난다는 걸 그녀는 받아들였다. 나는 그녀 목덜미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녀는 내 허리벨트를 풀었다. 나는 엉덩이를 들어주었다. 브레이크도 엑셀도 밟을 수 없었다. 한 손으로 잡은 핸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입이 벌어지고 허리가 들리고 경련하다 뻣뻣해졌다. 창에 비친 시커먼 입 속, 초점을 잃어가는 눈빛, 고통에 찡그리다 욕망에 일그러지는 얼굴, 추하다. 욕되다. 보기 싫다. 갑자기 시야가 하얘졌다. 차는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곡선을 직진했다. 차는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도로를 벗어난 차는 몇 번을 구르다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정신을 잃었다. 얼마간 평안한 시간이 흘렀다. 일순 불길이 일었다. 엄청난 통증에 눈이 떠졌다. 조각난 어깨뼈가 달그락댔다. 무릎까지 내려간 바지, 발기한 채 피 흘리는 그것이 보였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 추한 몰골로 죽을 수는 없었다. 감추고 싶었다. 그것을 죽이고 숨겨야만 했다. 부러진 팔이 초능력을 발휘했다. 나는 바지를 치켜 올렸다. 그녀의 목숨보다 체면이 중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살아서 내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는데, 그녀는 왜 살려달라 소리치지 않았을까. 그날 나는 살아남았고, 그녀는 죽었다.      


여자는 밤마다 나를 블랙홀에 떨어뜨리는 아내가 보낸 암살자일지도 모른다. 정숙이 부검한 거 모르지. 그애 몸에서……, 내 동생이랑. 니가 인간이니? 당신은 편하게 살면 안 돼. 죽는 날까지 고통을 느끼며 살아야지, 아하하하. 내 더러운 욕망을 꾸짖는, 아내의 최후통첩은 간단명료했다. 다 버리고 떠나. 언론에 다 까발려지고, 법정에서 망신당하고, 책 분서당하고, 만신창이 돼서 떠날래, 조용히 떠날래. 아내는 조용히, 에 방점을 찍었다. 어차피 떠나야만 끝나는 관계였다. 체면이 중요한 나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다신 세상 밖으로 나오지 마. 죽은 듯이 살아. 아내의 충고에 나는 고맙다고 끄덕였다. 아내에게 모든 재산을 주고 추악한 이름은 버렸다. 재산은 빼앗기고 이름은 버려진 게 맞을 것이었다. 남은 건 안 죽을 만큼의 기억과 비루한 목숨이었다.     


멈춰버린 시간을 견디는 시간은 무자비한 고통이다. 여자는 내 뒤통수를 내리칠 돌을 고르고 있다. 도망쳐야 하는데 나는 형틀에 매달린 죄인이다. 여자는 말이 없다. 개새끼! 욕하고 침 뱉고 돌아섰으면 좋겠다. 새가 눈에 걸린다. 새는 모욕을 참아내며 꼿꼿하게 혁명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기억이 무서워 벌벌 떨고 있다. 새를 노려본다. 움직이지 않는 새는 죽었다. 새도 나처럼 실패했다. 실패자의 변명은 지긋지긋하다. 사는 게 지루해진다. 재미없는 풍경에 파문을 일으키고 싶다. 현자는 아니더라도 너그러운 노인처럼 얼마 남지 않은 삶일지라도 긍정하고 싶은데, 지금 나는 새의 모가지를 단박에 끊을 돌을 찾고 있다.


어르신 제가 잘못했어요. 혁명중인 새, 다신 방해하지 않을 게요.

여자는 KF94마스크를 벤치에 올려놓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여자의 발짝 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발짝 소리가 사라지길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뜨면 끝없이 추락하며 비명을 질러대는 내가 보일 것 같았다. 발짝 소리가 끝나고 내 숨소리만 남았다. 나는 눈을 뜬다. 새를 본다. 새는 그대로 있다. 새는 살아있다. 새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코 혁명을 멈출 나약한 새가 아니다. 나는 다시 양반다리로 앉아 새와 같은 마음이 된다.      


바람이 솔솔 분다. 내가 흔들리니 새도 흔들린다. 너무 졸리다. 눈꺼풀을 들 힘조차 없다. 더는 현실을 버틸 수 없다. 나는 양반다리를 풀고 벤치에 눕는다. 생의 무게를 내려놓으면 중력은 사라진다. 혁명 따위 개나 줘버리고, 나는 반수면상태에 빠진다. 이대로 잠들어 죽으면 기억은 소멸하고 고통도 끝난다. 좋다. 풍장이 좋겠다. 바람이 살을 벗기고 해가 뼈를 녹여,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면 좋겠다.      


아가들이 사료 먹는 소리가 난다. 사과 씹는 소리 같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햄버건가. 피잔가. 저녁 먹을 시간이 됐나 보다. 배가 고프다. 자고 있으면서도 온통 먹는 생각뿐이다. 대여섯 살 때부터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학벌은 위대했다. 고졸이란 딱지가 진저리치게 싫었다. 도서관에 숨어 수만 권의 책을 읽었다. 나를 무시한 인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것저것 짜깁기해 마흔이 넘은 나이에 데뷔했다. 문학상을 3개나 받곤 겸손한 척했다. 교수가 돼선 순수한 척했다. 술에 취하면 제자를 끌어안았다. 문학보다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걸 초월한다는 허튼소릴 했다. 사랑엔 어떤 장애물도 없다. 아내의 동생과 몸을 섞으면서도 죄책감은 없었다. 목숨보다 중한 체면 덕분에 나는 살았고, 그녀를 죽였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괴물이다. 식욕이 들끓는 쥐새끼다. 일흔이 됐는데도 배만 고프지 않으면, 나는 얼씨구나 좋았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양말이, 대구빡, 슬렁이, 돼지에게 밥을 챙겨주고, 나도 밥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혁명의 성패보다 하루의 끼니를 걱정할 때다. 식구들 모두 배부르면 혁명은 필요 없다. 골방에 누워 걱정 없는 배 두드리며 빅뱅을 연구하다가, 어둠에 갇히면 우주로 탈출해 넉넉한 마음으로 지구를 관조하는 위대한 인간이 되리라.     


고단한 저녁이 연못을 덮기 시작했다. 공기는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새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는 처음 본 그 자세 그대로였다. 보는 나는 지쳤다. 하는 새는 더 지쳤을 터였다. 나는 새를 응원한다. 살아가는 매 순간, 모든 순간들이 혁명이다. 오늘 못 이룬 혁명, 내일 이루면 되고, 내일도 안 되면 모레, 희망을 놓지 않으면 된다. 희망에 용기를 더해야겠다. 용기를 잃지 않으면 혁명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나는 새를 응원한다는 핑계로 나를 응원했다. 배낭을 메고 일어나 붉은 해에게 안녕, 손을 흔들었다. 그때, 수면에 불꽃이 튀었다. 부리에 걸린 물고기는 생의 마지막을 몸부림쳤다. 온몸으로 내지르는 환호성, 승리의 세레모니. 새가 이겼다. 새는 기어이 혁명을 완수했다. 새는 날개를 느리게 펄럭이다 세차게 날아올랐다. 지친 해가 잠드는 저 너머까지 날아가 오늘의 성공을 기억하리라. 가슴이 벅차오르고 뜨거워졌다. 혁명의 출발선에 서서 총소리를 기다리는 전사처럼 불끈, 힘이 솟았다.      


벤치 끝에 앉아있던 빅맥이 안녕, 했다. 돼지의 엉덩이처럼 통통했다. 식고 살이 빠져 납작해진 붕어빵과는 달랐다. 나는 두 손으로 보물을 다루듯 빅맥을 감싸들었다. 따뜻했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햄버거를 볼에 댔다. 응어리가 녹아 화색이 돌았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느낌이 핏줄을 따라 퍼졌다. 종이를 벗기자 두툼한 고기가 맛있게 구워지고 있었다. 기분 좋은 식욕이 샘솟았다. 나는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먹었다. 처음 맛보는 맛이었다. 여태껏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햄버거였다. 그동안 찢어지고 아문 상처의 시간들이 서로 잇닿고 엮여 곰삭은 특별한 맛이었다. 목이 메어 콜라를 단숨에 들이켰다.      


벤치 밑에서 새끼고양이가 운다. 한마리가 아니다. 두 마리, 세 마리, 고양이들이 몰려나온다. 고양이들도 살기 위한 혁명의 저녁을 시작하고 있다. 특별하지 않게 시작할지 모르는 내일의 아침과, 무탈하게 끝날지 모를 내일의 저녁을 위해, 힘내 걷는다. 나는 느린 걸음에 진한 그림자를 붙잡고 집으로 간다. 혁명의 저녁은 끝나가고, 성공이든 실패든 중요하지 않은 나의 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피아노가 노래한다. 나만을 위한 소리가 으리으리하게 울렸다. 나는 손톱만 한 여자가 우주 같은 마음으로 연주하는 피아노소리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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