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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닙 Jun 14. 2021

씩씩한 개복치

상암동 방송국 디자이너

나는 겁이 많다. 속어로 쫄보라고도 한다.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사는 사람이기에 나에게 월요일은 매주 끊임없이 주어지는 ‘N주차 과제’와 같다.

여느 ‘과제’가 그러하듯, 고민과 걱정이 많은 나에게 톡 건들면 기절하는 ‘개복치’, 남의 걱정까지 흡수하는 ‘걱정인형’ 등의 각종 겁쟁이류 별명이 따라붙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수능을 2번 응시하는 일 없이 단번에 합격한 2년제 예술 대학의 영상과를 졸업하자마자 공연 영상 회사의 영상팀 디자이너가 된 나는 누구보다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연 영상은 예상보다 더 더 더 많이 힘든 분야였다. 보통 콘서트, 연극 및 각종 공연 중에 무대에 활용되는 모든 영상, 특히 백그라운드에 크게 송출되는 영상을 제작한다. 한 아이돌 그룹의 경우 늘 해외 공연을 다녔는데, 덕분에 다양한 세계 각국의 시차에 맞추어 일해야 했다. 그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리허설을 시작하면 그 시간에 맞춰 대기하고 있다가 무대 동선 및 영상을 체크하고 그에 따라 곧바로 영상을 수정해서 보내줘야 했다. 갑자기 공연 일자가 변경되어 예정된 스케줄보다 두 배는 앞당겨 매일 밤을 새워서 무대를 꾸며야 했고, 공연 당일에도 수없이 영상을 수정하거나 갑자기 공연 때 선보일 곡 리스트가 바뀌는 경우엔 고작 2시간 뒤 공연이어도 당장 새 영상을 만들어내야 했다.

무사히 한 프로젝트를 마치면 피 터지는 경쟁률 없이 당대 최고 인기 가수의 콘서트 스태프로 공연장을 누빌 수 있고, 초대장으로 지인들을 초대해 내가 참여한 공연을 몇 번이든 보여줄 수 있었다.

'뿌듯한 결말'이 있기까지 사무실 구석의 소파에서 웅크려 자고 며칠을 씻지 못하고 책상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숱한 새벽, 무척 바쁜 나머지 연락이 두절되어 부모님이 직장에 전화까지 하는 일상을 1년여 살아본 뒤, 당시 오래도록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할 것으로 추측되는 ‘방송 영상 디자이너’, 즉 ‘OAP(One-air Promotion) 디자이너’의 꿈을 꾸게 되었다.

(OAP 디자인 : 방송 홍보 영상을 만드는 영역이다. 채널의 이미지를 노출하는 네트워크 디자인, 프로그램 기획/디자인, 그 외 다양한 홍보 영상 및 채널에 상시로 노출되는 모든 디자인을 담당한다.)

그리고 꿈을 좇아 방송국이 몰린 상암동에서 프리랜서 OAP 디자이너로서 일하게 되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일상을 지내보니 ‘노비여도 대감집 노비를 하라’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처럼, 정규직 선배님들과 사뭇 다른 위치였지만 배우는 일,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보다 내 희망 사항에 가까워졌다.

2015년 당시 한 방송사의 프리랜서 디자이너이자 팀의 막내인 내가 정규직으로 타 방송사에 합격하고 주변의 선배들에게 합격 소식을 알리던 날, 선배들은 각자 한 마디씩 하셨다.


“급여가 그저 그렇네. 군대 갔다고 생각하고 2년만 버티고 나와.”
“니 덕분에 내가 90년대 생이랑 일도 해보고, 정말 수고 많았어.”
“너무 축하해요! 다른 곳에 가서도 잘 해낼 거예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만 해요.”
“계속 연락하자. 밥도 먹고.”


정규직 방송국 디자이너가 된 후 나의 일상은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2년만 버티라던 한 선배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들어선 새 직장은 나와 함께 입사한 4명의 동기가 있었고 유독 웃음 코드가 잘 맞는 그들과 함께 어느덧 5년 하고도 반년을 더 일했다.


매주 새로운 예고편을 만들고, 담당하는 채널에 송출되는 네트워크 디자인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직접 기획한 기획안에 따라 촬영장에서 카메라 감독과 출연자를 멋지게 담아내 편집하고 한 편의 영상물로 만드는 일.

프로그램이 끝날 때 지나가는 스크롤에 ‘방송 디자인’ 옆에 내 이름이 지나가는 일.

익숙한 하루가 되어버린 내일이 출근하면 다시 시작되는 매일.


다만, 겁이 많은 나는 의외의 야망을 품고 있었다.

다른 직장인이 그러하듯,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당시의 업무보다 더 많은 영역, 주어진 일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진 것이다.

마치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에서 꼬물꼬물 발아한 간지러운 새싹이 내 뱃속에 움튼 느낌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 이별해야 하는 것, 도전을 위해 준비할 것들이 뱃멀미처럼 속을 울렁이게 했다. 손대면 톡 하면 기절할 듯한 개복치 치고는 대담한 야망이었다.


2020년 11월, 동종업계로 이직한 나는 여전히 상암동에 출퇴근한다. 여전히 전 직장 동기들을 만나 전 직장 1층 커피숍에서 만나 커피도 마신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연락해서 점심을 한 끼 같이한다.


이직한 직장은 전 직장과 고작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는 정도의 거리 차이였지만 유독 겁이 많은 나에겐 지구 반대편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큰 용기였다.


남이 보기에 대단한 일이 아닐지라도 굳이 익숙한 일상을 놓아주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픈 목표를 따라가는 용기를 가진 겁쟁이. 용기 있는 내가 될 그 날까지! 나는 씩씩한 상암동 개복치로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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