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오래된 건물들은 대부분 규모가 아주 작다.
그나마 조금 큰 것은 요즘 카페로 개조해서 많이 사용하는 흔히 말하는 돌창고다.
짓는 방법은 간단하다. 벽체는 돌로 쌓은 후 틈새를 시멘트로 거칠게 바른다.
입구는 운반기계가 드나들기 쉽게 크게 미닫이로 하고 창문은 단지 환기를 위해서 작게 낸다.
지붕은 삼나무로 짠 트러스를 올리고 그 위에 얇은 슬레이트 판을 얹는다.
이전에는 각자 밭마다 귤을 수확한 후 임시로 저장하다 매매가 성사되면 바로 상인이 실어갔다.
여러 곳의 귤들을 실어와 선별하고 포장하는 선과장을 짓기 시작한 건 오래지 않았다.
규모와 생김새가 돌창고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기 화가 부부가 운영하는 그림상회라는 카페 건물 역시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벽돌로 지어진 선과장이었다.
외관은 몇 차례 큰 수리를 거친 흔적이 있다.
지붕을 높이 들어 올리면서 벽을 덧댄 이음새와 크게 낸 창문들, 빗물이 들지 않는 한쪽 구석에 내려앉은 흙빛 먼지들이 오래전 이 건물의 생김새를 추측하게 한다.
실내로 들어서니 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고재 기둥들이 지붕의 트러스를 단단히 받치고 있다.
그 때문에 내부는 꽤 널찍하다. 입구의 왼쪽 벽에 캔버스들이 책처럼 가지런히 쌓여있다.
자화상인 듯한 한 남자의 얼굴을 그린 것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중에 그리다 만 것들도 꽤 있다. 반대쪽으로는 오래된 오브제들이 단정하게 자리 잡았다.
나는 그림을 볼 때 코가 캔버스에 닿을 만큼 살피는 버릇이 있다.
질감을 가진 표면들이 촉각, 특히 손을 자극하는 것이다.
마치 소설을 읽을 때처럼 장면을 상상하듯이 그림이 그려지던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화가의 팔과 함께 형상의 흐름을 대로 붓의 자국을 따라간다.
멀리서 보면 한 톤의 색채이지만 대상들이 서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색채가 미묘하게 그리고 다채롭게 변한다.
그럴 때 나 역시 물감을 다시 섞어 칠한다. 그림은 사물처럼 정지된 화면이 아니라 항상 유동적이며 에너지를 가진 생명체다.
이 공간 역시 벽에 걸린 그림들처럼 특별하다.
공간의 크기도, 공간을 지탱하는 지붕의 트러스와 이를 받치는 기둥들도 익숙한 규격과는 거리가 멀다.
문틀과 선반들, 테이블을 한참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주인이 나를 보여줄 곳이 있다며 안내한다.
문이 열리고 아지트처럼 보이는 또 다른 장소가 나타났다. 안쪽의 거대한 창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식물들의 거처였고 빈티지 소품으로 장식된 작업실이었다. 아, 얼마나 탐나는 공간인지!
나는 자라면서 공간에 대한 허기가 유독 심했다.
식구들이 많아서 방을 항상 같이 사용해야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혼자만을 위한 방을 구획하고 책상과 잠자리를 꾸미는 일들을 어떤 놀이처럼 되풀이하곤 했다.
그때의 습관 탓일까? 아직도 결이 좋은 나무 책상이 놓인 멋있는 작업실은 어느 때고 나를 사로잡는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하얀 벽을 배경으로 걸려있는 그림들이다.
검은색으로 표현한 그림의 주제들이나 작은 조각품들이 강렬하다.
빛과 대조되는 어둠의 색이 아니라 밝은 빛과 균형을 이루는 색이다. 땅의 색이고 힘의 색이다.
가족의 형상을 한 돌에 새겨진 끌의 흔적은 진실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나중에야 알아챘다.
안쪽에 있는 주방의 중심에 자리 잡은 화덕이다. 섬세하게 다듬어 만든 듯 보였다. 사람을 모여들게 하는 따스한 온기가 이 공간 전체를 순환하고 있다.
‘욕망이 사라지면 관계는 심플해진다. 공간도 사람도. 좀 건조해지긴 하지만’ 하고 말하는 호스트.
그가 말한 '사라진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된 욕망을 일컫는 것이리라.
다시 말하면 자기답지 못한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 창조적 에너지로서의 욕망이 들어서면 타인과의 관계 역시 단순해진다는 뜻이지 않을까?
그의 말처럼 ‘오늘 저녁 날씨는 바람이 없어 더없이 평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