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명인의 죽음
새벽에 눈이 떠지면 한참을 침대에서 껌뻑껌뻑 생각한다.
바람 같은 것을, 기도 같은 것을.
그러다 돌연 일어난다. 어떤 암시도 없이 일어나서 비적비적 걸어서 거실로 간다.
스탠드를 켜고 앉아 읽다 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폈다. 책상은 읽다 만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인간 실격>, <역사 강의>, <교사 바이블> 그 외 잡다한 물건들이 올라와 있는 책상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이반 일리치가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잘 안다'라는 것은 그 사람의 어떤 모습을 아는 걸까?
소설을 읽으면서 그의 '마음'을 행동 이면의 '저의'를 알았기에, 나는 그를 잘 안다고 여긴다.
그를 '이반'이라고 줄여 불러야 할지, '일리치'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면서.
새벽과 죽음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죽음은 돌연 찾아오는 것이다. 어울리는 시간을 가려서 찾아오지 않는다.
병의 고통 속에서 드디어 이반 일리치는 깨닫는다.
결국 이곳을 단장하느라 목숨을 희생한 셈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65쪽
그의 거실, 잘나가는 사람의 집과 유사하게 꾸며둔 그 거실 말이다.
거실을 단장하느라 애쓰고, 몸소 커튼을 달다 넘어졌을 때 생겼던 상처와 고통의 근원이 같다고 판단한다.
그때 그 상처로 인해 병이 생긴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상처와 병이 관계가 없다고 보는 쪽이 타당해 보이지만 타당한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국, 정말 결국은 거실을 단장하기 위해 그의 삶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 거실을 꾸미고, 그 안에서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과
있어 보이는 물품들로 구색을 갖추고 초대하는 것은 다르다.
이미 드러내었고, 이미 숨기었으므로.
이반 일리치의 거실에서 '그럴듯하게 사는 나'로 변장한 그는 그 안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다른 사람과 실제적으로 교류하지 못했고, 자신과도 교제하지 못했다.
'나'와 '그럴듯하게 사는 나'는 서로를 싫어한다.
서로가 가짜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 거짓,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거짓이야말로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나날을 독살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74쪽
자신도, 가까운 주변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외면한다. 아무도 그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거나 그런 뉘앙스조차 풍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의 대화는 정말 궁금해서가 아니라 묻기 위해 그냥 묻는 질문으로 이뤄졌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죽음 앞에서 마음껏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 놓고 안겨 울 만한 사람이 없다. 어린아이처럼 무섭다고 울고, 토닥임을 받고 싶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그를 '한 사람'이 아니라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뿐이다. 그가 죽으면 고통에서 해방된다고 생각하는 아내(하지만 월급봉투가 같이 사라지므로 슬퍼하는, 그 슬픔을 표현하지는 않는)와 그가 죽으면 생기는 보직에 군침을 흘리는 동료들이다.
거짓의 시작은 누구였을까? 이반 일리치는 왜 끝까지 자신의 공포를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걸까?
거짓을 알아챘을 때, 왜 벗어나지 못했을까?
자신이 살아온 삶이 거짓에 기반한 거라면 자신의 인생은 헛된 것이 되어 버린다.
죽어가는 게 분명한 상황에서 그런 참회가 불러오는 것은 더 큰 정신적 고통이다.
그는 끔찍한 고통을 당하느니 죽는 날까지 '살던 대로' 살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아들 바라심이 그의 손을 잡아 주었을 때,
그는 인생의 헛됨을 인정하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는다.
그는 마지막에 '끝난 것은 죽음이야'라고 했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 그의 영혼이 질문을 건네온다.
'너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사는 것? 어떻게 사는 것?'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던가, 잘, 유쾌하게?'
그에게 떠오르는 건 유년 시절이다.
그 이후의 삶은 '사회 통념으로 보기에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89쪽)'
어떤 약도 듣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어쨌든 이러는 게 죽음보다는 낫다'라고 했던 이반 일리치의 말이 마음에 엉겼다.
나는 그가 겪은 극심한 고통을 모른다.
시간과 날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채로 누워만 있는 괴로움을 나는 모른다.
언젠가 닥칠 수 있지만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을 이반 일리치가 내게 일러준다.
SNS는 이반 일리치가 공들여 꾸민 거실 같다.
사람들은 그곳에 가장 좋았던 곳, 가장 맛있었던 음식 사진 같은 것을 올린다.
보정한 자신과 지인들의 사진도 올라온다.
그런 전시는, 전시를 위한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
그럴듯하게 사는 나.
그럴 듯.
그럴듯!
이반 일리치의 죽음저자톨스토이출판민음사발매202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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