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며느리의 연대

시간은 정말 약이었나보다

by 이니슨
며느리 : 존중받고 이해받고 싶은, 그저 한 명의 사람


“엄마가 못돼 먹어서 애가 딸기를 한 번 못 먹네!”

결혼 2년 차, 큰 아이 임신 중일 때 시어머니에게 들은 말이다. 집에 딸기를 사놨으니 와서 먹으라시는데 며칠간 가지 못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아직도 딸기를 먹을 때면 그날이 떠오른다.

woman-g1f48fb123_1920.jpg K-며느리의 연대 ⓒ픽사베이


그렇다. 나는 고릿적 사상을 가진 K-시댁에 하나뿐인 며느리로 입성했다. 시댁 식구들과 찐가족처럼 잘 지내는 삶을 꿈꿨지만 시어머니가 결혼식 폐백에서 “너 (신혼여행) 다녀와서 보자!”며 눈을 흘길 때부터, 신혼여행 후 첫인사 자리에서 “이제 친정하고는 정 떼야 하니 자주 가지 마라!”며 으름장을 놓을 때부터, 결혼은 했으나 늘 친정에 와 있는 시누이 둘이 “3년 벙어리, 3년 귀머거리”를 강조할 때부터 내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을 것이라 직감했다.


시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차고 넘치는 분이다. 고기나 과일을 먹을 때, 지인에게 맛있는 음식을 얻었을 때, 그 밖의 여러 경우에 자식들이 생각나 다 같이 시간 보내길 원하신다. 때문에 일주일에 서너 번씩 온 가족이 모였다. 부름에 응하지 않으면 며칠의 눈칫밥이 이어지고. 결혼 전 부모님은 한 달에 두 어번만 찾아뵈면 된다던 남편은 희대의 사기꾼이었다.


같이 만나 즐거운 것도 한두 번이지. 시어머니와 손윗 시누이 둘이 늘 함께 있는 시댁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내겐 친정과 정을 떼라더니, 시댁의 모든 것이 모순 같았다. 게다가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를 반복하며 인정보다 질책 받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그 즈음부터 우울감이 시작됐던 것 같다. 산후우울증, 육아우울증까지 더해져 하루에도 수차례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가 머리를 저으며 참아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더니 가족이 공중분해될 위기를 몇 번 겪으며 나는 좀 더 어른이 됐고, 맹수같이 날카로웠던 시어머니는 이빨이 많이 닳았다. 덕분에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고 깊어졌다.


시어머니는 장남의 아내로 당신의 시어머니와 시동생들까지 다 챙겨야 했던,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시절을 견뎌낸 전통적인 K-며느리다. 어느 날부터 “예전엔 그렇게 도망가고 싶었는데 우리 OO(내 남편) 때문에 그럴 수 없었지.”라는 말씀에 가슴이 아렸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다 보니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자식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결혼으로 연결된 가족들을 건사하느라 정작 내 자식들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미안함과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등바등 살다가 이제 좀 여유가 있어지니 자식들은 다 커서 품을 떠났고, 남은 건 병들고 아픈 몸 뿐이라니.. 이쯤 되니 그의 일생이 몹시 애틋해졌다. 여자 대 여자로서 더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참 이상하게도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일종의 가해자에게서 연대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며느리 손에 물 묻히지 말라고 손수 그릇을 헹궈내는 시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며 “저는 도망 안 가고 내쫓을 거예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woman-g8c71da7de_1920.jpg K-며느리의 연대 ⓒ픽사베이


시어머니는 여전히 자식들에게 관심이 많으시다. 매일 전화로 일상을 물으시고, 쉬는 날이면 당연히 우리 가족을 기다리신다. 또, 뵙고 온 다음 날에도 목소리 못 들은 지 오래됐다며 전화를 하시고, 일주일만에 만나도 얼굴 까먹을 뻔했다며 그렇게 반가워하신다. 그런 시어머니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 여전하다. 그럼에도 같은 여자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함께 건너온 시간 덕분에 “누가 보면 저희 외국에 사는 줄 알겠어요~”라고 건방을 떨며 웃어댄다.


이제서야 극단적인 생각 대신 시어머니 최 여사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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