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창볶음을 좋아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곱창볶음에 소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곱창볶음에 어떤 효과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좋아하는 안주가 그것일 뿐인데도 그것을 먹으면 어쩐지 꽉 막혔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가슴이 답답하고 힘들 땐 으레 곱창볶음 생각이 나곤 한다.
"엄마~ 곱창 트럭 왔어~" 농구교실에 다녀오던 1호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의 저녁을 차리려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온 곱창볶음 푸드트럭이 반가웠는지 아이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아이가 먹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지, 라는 핑계를 대며 주문을 했지만 사실은 내가 먹고 싶은 것이었다. 내친김에 곱창 사리까지 추가했다.
결혼 초 동네에 곱창볶음 가게가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맛은 있었다.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나는 씁씁 입에 공기를 불어넣으면서도 젓가락을 놓지 않았다. 넓은 불판에 수북이 쌓아 올려진 곱창볶음을 앞에 두고 남편과 나는 핑크빛 미래를 꿈꿨다. 그리곤 얘기했었다. 혹시라도 다투는 날이 있으면 여기서 만나자고. 오늘처럼 곱창볶음에 소주 한 잔 하며 가볍게 털어내 보자고.
그날의 약속은 바쁜 일상 속에 자연스레 희석됐다. 사업 초기인 데다 가장이 된 그는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감에 사업적으로도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책임감까지 더해져 말 못 할 돌덩이를 감추느라 물러섰고, 며느리가 된 나는 너무 다른 환경에 흡수되지 못하고 파울볼처럼 튕겨 나가 돌아서기 바빴다.
"나 너무 힘들고 우울해."
"니가 뭘 한다고 우울해!"
그는 나의 힘듦을 이해하지 못했고,
"내가 밖에서 노느라 늦어?"
"누가 노느라 늦는대?"
나는 그의 어려움을 헤아리지 못했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더 그랬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늘어난 그는 더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렸고, 아이도 가정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나는 버려진 듯 비참했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우리는 아픔, 서러움, 서운함들을 털어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품었다.
각자의 동굴을 간직한 채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다 보니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날의 약속은 기억 어딘가로 바래졌지만 힘들 땐 으레 곱창볶음에 소주 한 잔 딱 하면 좋겠다 싶다.
다퉜을 때 같이 먹고 풀자던 곱창볶음을, 혼자 먹는 날들이 많아졌다. 두 아이를 재운 후 아직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불 꺼진 식탁 한 켠에서. 혼자 마시는 소주는 썼고, 곱창볶음은 유독 매웠다.비루한 내 삶을 비관하다, 무관심한 남편 탓도 하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안주 삼아 뜯고 찢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해 각자 서운하고 분노하고 체념하고 포기하기를 반복하며 깊어진 골은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혼자 먹은 곱창볶음의 양만큼 우리는 멀어졌을 테니까. 그런데 재밌게도 시간이라는 접착제가 차곡차곡 쌓인 모양이다.아니면 분노로 변한 설렘이 연민과 연대의 감정으로 진화라도 한 걸까. 부아가 치밀던 가슴엔 이해가, 불평이 가득했던 마음엔 배려가 싹텄다.
밤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고생이 많아요. 늘 고맙게 생각해."라고, 아이들 돌보기에 지친 내게 남편은 "내가 애들 좀 데리고 나갔다 올게."라고 말할 여유가 생겼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더니 이제야 굳어진 땅에 발을 내딛게 됐다.
아이랑 서로 더 먹겠다며 젓가락 싸움을 하다가 문득 그런 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와 생각하니 참 진부하게 웃기고 허무한 시간들이었다.
"ㅇㅇ야. 엄마랑 아빠랑 옛날에 말이야. 서로 싸우고 맘이 상했을 때 만나자고 약속했던 곱창볶음 가게가 있었다~"
"진짜? 그래서 거기서 계속 만났어?"
"아니~. 약속은 했는데 만나지는 못했어."
"왜? 약속했다면서!"
"삶이란 게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진 만은 않거든.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는데, 좋을 때는 좋아서, 또 싫을 때는 싫어서 자꾸 잊게 되더라고."
"그럼 그냥 싸웠어?"
"그럴 여유조차 없이 정신없게 살다 보니 지금인 거야. 근데 되게 신기하게 시간이 지나니까 또 막 괜찮더라~"
"그랬구나. 그럼 그냥 나랑 먹으면 되지."
"그래. 그러자!"
그날처럼, 아이와 약속을 했다. 힘들고 서운한 일이 있을 땐 숨겨서 쌓아두는 마음 없이 곱창볶음 앞에서 훌훌 털어낼 수 있는 관계가 되자고.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 날이 있겠지만 너무 늦지 않게 단단한 땅 위에서 만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