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였다. 큰 도로에서 막 횡단보도 보행자 신호가 들어왔을 때였다. 신호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건지, 신호를 보고도 속도가 빨라 바로 정지하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택시 한 대가 횡단보도를 침범해 한 사람과 충돌했는데 사람이 넘어져서 흡사 택시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보였다.
그날의 충격이 컸는지 20년도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진하게 남아있다. 성인이 돼서도 최대한 운전을 멀리 하고 싶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며 편의상 운전을 시작하게 됐다. 설렘만큼 두려움이 컸다. 고속도로에서는 마음이 편했지만 시내도로나 주택가에서는 운전하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아니, 8년째 운전을 하고 있는데 여전히 그렇다. 운전이 이렇게 공포스러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늘 긴장 상태다. 특히 횡단보도 앞에서는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고 자연스레 발이 브레이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주차를 한 후에는 혹시나 내가 인지하지 못한, 사고 유사 상황 같은 게 있지는 않았을까 우려돼 블랙박스를 뒤져 본다. 돌려보며 내 운전 실력을 평가하고 차선 변경, 횡단보도 멈춤 등의 타이밍과 위치를 더 잘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면 쭈그려 앉아 차 밑을 살피며 안도한다. 그날의 기억 때문에.
운전이 쉬이 늘지 않고, 겁이 많으며, 매번 블랙박스를 열어보는 내가 답답했다. 나를 보는 타인의 시선도 그렇고, 내가 정신병의 일종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될 정도였다.
나는 왜 이렇게 겁이 많을까, 왜 이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안고 살까. 고민하던 날들이 있었다. 어린 날의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작아지는 내가 싫었다.
트라우마는 오로지 배척해야 하는 대상이니 극복하고 이겨내야만 했다.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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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세게 달리지 않으니까 마음이 편안해', '너처럼 운전하는 사람만 있으면 사고 날 일이 없을 것 같아', '운전 진짜 차분히 잘한다'라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비록 역설적인 표현이라 해도 그 말 안엔 희망이 있었다. 감추고 극복해야만 했던 내 트라우마에도 장점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는 비정상적인 공포로 여겨질 수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안전한 운전을 위한 밑거름이었다. 완전하진 않아도 안전한 운전, 빠르진 않아도 바른 운전. 내가 가진 트라우마는 이제 내 장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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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트라우마 하나쯤 생기게 마련이다. 그 정도가 심해 정신병은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고. 내 트라우마를 타인에게 이해시키지 못해 외롭기도, 이겨내지 못해 괴롭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달리 생각해 보자. 동전에 양면이 있듯 트라우마에도 다른 면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의 장점이자 나를 표현하는 특징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찾아보자, 내 트라우마의 뒷면을. 그로 인한 이점을.
나는 여전히 주차 후 블랙박스를 본다. 달라진 것은 이제 이벤트로 찍힌 것만 찾아본다는 것. 차 밑을 살피는 건 여전하지만 그만큼 안전하게 운전하자는 마음을 더 단단히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