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남이 사고 싶은 바구니가 아니라

팔지 않아도 되는 바구니가 되길

by 대강철저

애가 셋이 되자 사람들은 내가 일을 계속할 거라는 기대를 암묵적으로 거두었다.

앞으로는 애만 키우겠지 라는 가정 하에 나를 대한다.

나의 사회적 지위와 위신은 어느새 전생의 기억이 되었다.

직장에서만 의례적으로 휴직 연장 여부를 물어볼 뿐 아무도 내가 일을 하러 갈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언제든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맹수 마냥 호시탐탐 복직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하지만 자주 좌절한다.

아이들이 아파서 어린이집에 못 가거나

아이들이 내 다리에 매달려 울 때마다

나는 언제 이 덫에서 풀려나 훨훨 날아갈 수 있을까 한숨을 쉰다.


지금은 복직을 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아마 내가 벌게 될 돈보다 세 아이의 등하원 및 가사 비용으로 나갈 돈이 더 많을 거다.

애초에 아이 셋을 등하원을 할 사람을 구하기도 힘들다.

지금도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녹초가 되는데 일을 하고 와서 아이들을 볼 수 있을까.

이도 저도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당분간 복직이 요원하다는 점이 늘 나를 불안하게 한다.

사회로부터 영영 단절이 될까 흡사 와이파이가 없는 지역으로 이민을 가는 듯한 공포를 종종 느낀다.

들리는 이야기로(원래 건너 들은 이야기가 더 무섭다) 나의 직업 환경이 코로나로 급변하고 있다는데 나는 영영 못 돌아가는 건가.

이렇게 이름만 있고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유니콘 같은 장기휴직자가 되는 것인가.

돌아가더라도 영영 부적응자가 되려나.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답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매일 해댄다.


나는 원래도 새로운 환경에 물처럼 자연스레 스며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매번 부딪히고 깨지면서 하나씩 배우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변했을 환경에 겁이 난다.


이렇게 고이게 되는 건가.

내 인생은 결국 이렇게 멈춰지는 건가.

기나긴 경력단절은 결국 경력종결이 되는 건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더 무섭듯이 나는 복직만 생각하면 앞이 깜깜하다.


그런데 한편으론 오래 휴직하고 돌아가면 뭐가 문젠가 싶기도 하다.

결국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나의 본업인데 직접 낳고 키워보고 돌아가면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더 넓은 이해심으로 대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지식과 학생에 대한 폭넓은 이해심이라면 아마 더 즐겁게 지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최소한 아이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의 온도가 조금은 따뜻해졌을 거라 믿는다. 그 아이가 내 눈앞에 오기까지 흘렸을 부모의 눈물을 아니까.



까짓 거 애셋 낳고 키우는 거보다 어려우랴.


이 말엔 적이 없다.


아이들이 엄마품보다 친구들 무리 속에 있길 원하는 때에 복직한다면 새로운 환경으로의 착륙이 조금 수월할 것 같다. 갑자기 희망이 약간 솟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긴 경력단절의 시간이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모습을 연구하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남들과 조금 다른 길을 간다고 해서 뒤쳐지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정답이 하나인 것은 아니니까.


나는 나만의 답을 찾으면 된다.


나는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나오는 이 일화를 좋아한다.


얼마 전에 한 인디언 행상이 우리 마을에 사는 유명한 변호사의 집으로 바구니를 팔러 왔다.
"바구니를 사지 않겠습니까?"하고 그는 물었다. "아니오, 살 생각이 없습니다"라는 것이 대답이었다.
"뭐요? 우리를 굶겨 죽일 생각이오?"하고 대문을 나가면서 그 인디언은 외쳤다. (중략) 그 인디언은 바구니를 만들어 놓으면 자기 일은 끝나고, 바구니를 사는 것은 백인의 임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남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바구니를 만들든가, 최소한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이 들도록 만들든가 또는 살 가치가 있는 어떤 다른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다.


나 역시 하나의 바구니, 올이 섬세한 바구니 하나를 엮어놓았으나 그것을 남이 살 만한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 경우에 그 바구니는 역시 엮을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남이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팔지 않아도 될 것인가를 연구했다. 사람들이 찬양하고 성공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삶은 단지 한 종류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다른 여러 종류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한 가지 삶을 과대평가하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남이 사고 싶은 바구니를 만들려고 애를 쓰며 살아온 것 같다.

아이도 낳고 싶고 일도 잘하고 싶었다.


가능한 줄 알았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니면 나도 복직해서 나의 이름으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건조기랑 식기세척기가 있으면 집안일은 알아서 굴러갈 줄 알았다.

청소도우미에 반찬도 사 먹는데도 복직을 하지 못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나의 미래는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일에서도 인정받고 아이들도 잘 키우는 그런 모습을 상상해왔다.

최소한 당분간 둘 다 쥘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바구니를 안 사겠다는 말을 들은 인디언 마냥 화가 났다. 나는 이렇게 끝인 건가.


하지만 나의 삶이 소로가 말한 '다른 사람들이 사고 싶은 바구니'가 아니라

'팔지 않아도 되는 바구니'라면 나의 삶을 조금 다르게 조금은 맘대로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조금은 다른 경로로 인생을 풀어가더라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지금의 일상을 언젠가 복직을 하기 전까지의 유예된 시간으로만 보지 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나날이라 생각해본다.


나의 일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꾸려가 본다.


직장인은 아니지만 나도 나만의 일과와 루틴이 있다.


요즘은 아이들을 재우면서 같이 잠들기 때문에 새벽에 눈이 떠진다.

일어나선 거실에 불을 켜고 하두하두에 올릴 책을 읽는다.

아이들이 깨면 아침을 간단히 준비해 먹인 후 등원 준비를 한다.

등원을 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영어공부 어플로 단어 30개와 듣기 10개를 하며 동네 한 바퀴를 걷는다. 집으로 와서는 아침에 어질러놓고 나간 식탁만 치우고 노트북을 켠다.

읽고 있던 책들 중에 표시를 해둔 문장들을 키보드로 치고 저장해둔다. 일종의 문장 수집이다.

디지털 필사로 뇌에 시동이 걸리면 읽은 문장들에서 생각을 뽑아 글을 쓴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2년 정도 매일 책을 읽다 보니 떠오르는 생각을 백지에 쏟아붓고 싶어졌다.

레고 피스들처럼 쏟아부은 생각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며 생각의 성을 쌓아보고 싶었다.

무엇을 만들지 정확히 그리고 레고를 하는 게 아니듯 무엇을 쓸지 정확히 알고 글을 쓰는 건 아니었다.

쓰다 보면 명확해지는 생각들이 있다.

지금 이 글도 <월든>을 필사하며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한 글이다.


한참 글을 쓰고 나서는 퇴고를 하다 보면 배가 고프다.

시계를 보고 대충 끼니를 때운 후 아이들을 먹일 게 있나 살펴본다.

밥을 하고 반찬을 확인하고 집을 뛰어다니며 치운 후 아이들을 데리러 간다.


하원하고 아이들을 재울 때까지는 책도 스마트폰도 모두 멀리 두고 오로지 아이들에게만 집중한다.

놀이터를 갔다 와서 목욕을 시키고 저녁을 먹인 후엔 틈틈이 빨래를 개며 아이들을 본다.

남편이 오면 늦은 저녁을 함께 먹으며 긴장을 푼다.

쌍둥이를 재우러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면 남편은 첫째를 씻기고 책을 읽어준 후 재운다.


일상의 흐름이 비슷한데 이것이 비슷하다는 것은 아이들이 모두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내일도 오늘만 같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가끔은 불안하고 가끔은 자신감이 넘친다.

나침반 끝이 계속 떨려가며 정북을 찾아가듯 그렇게 매일 불안해하며 나만의 길을 찾아간다.


내 인생은 판매용이 아니라 소장용이니까

나만의 것으로 유니크하게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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