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하나에서 셋으로 변할 때 소비 양상의 변화

물건에 대한 소비 vs. 경험에 대한 소비

by 대강철저

애가 하나에서 셋이 되고 가장 큰 고민은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쓰느냐에 관한 문제였다.


뉴스마다 나오지 않던가. 평균적으로 아이 하나를 키울 때 드는 비용 같은 기사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가슴에 돌덩이가 묵직하게 올려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이 하나 키우는데 3억이 들면... 나는 곱하기 3을 하면 9억이고.. 그럼 나중에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고 이럴 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면 나는 대체 얼마나 돈을 모아야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돈을 마련도 안 해놓고 애를 셋이나 낳은 나는 제정신인가... 하긴 그런 통계가 공공연하게 나오다 보니 사람들이 애를 안 낳는구나 싶기도 했다. 아 요새 사람들은 진짜 현명하구나.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더니.


...내 얘긴가?


그런데 막상 아이가 셋이 되고 보니 아이 하나에 들던 비용의 3배가 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아직은 모두 어린이집에 다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아이 하나를 키울 때보다 오히려 더 줄어드는 부분도 있다. 아이가 하나에서 셋이 되었지만 소비가 세배가 되지 않으려면 돈을 어디에 쓰느냐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필요했다.


아이 하나를 키울 때의 소비는 대부분 물건에 대한 소비였다. 각종 국민 장난감, 이유식 조리기구, 유모차, 아기 의자 등을 육아 '필수품'으로 여기며 야금야금 집안으로 들였고 아이에게 그때그때 필요할 법한 옷과 신발, 가방과 책들도 겨울철 먹을 도토리를 모으듯 모았다. 매달 사야할 물건의 리스트는 늘어났다. 막상 아기 의자를 사려고 해도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제일 좋은 아기의자를 사주지 못하는 미안함과 그렇다고 싸구려를 사줄 수는 없지 않냐는 마음의 소리가 버무려져 적당한 아기의자를 사놓고는 몇 번 쓰다 보면 어느새 아이는 어른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잠시 쓰고 창고행이 되는 물건들이 아기용품에는 많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쌍둥이가 태어나고서는 잠깐 쓰는 물건들은 모두 중고거래나 대여를 했다.

아기체육관은 당근 마켓에서 사서 두 달 쓰고 다시 팔았고, 쏘서 같은 부피가 큰 장난감은 업체에서 한두 달 대여했다. 대여를 하면 부피가 큰 장난감을 직접 배송해주고 알아서 가져가 주는 점이 편했다. 아기 의자도 많이 고민하지 않고 가장 단순한 형태의 이케아 아기 식탁의자를 중고로 샀다. 이유식을 먹을 때만 아기 식탁의자에 앉혀 먹였고 아이들이 걷기 시작한 후로는 큰 상을 펴서 먹였다. 누나와 쌍둥이 형제들이 같이 먹기에 그게 훨씬 편하다. '국민 아기의자' 이런 건 검색도 안 한다. 아무리 좋아봤자 '아기의자'일뿐이다. 몇 달 쓰고 만다. 아이들은 조금만 몸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지면 어른 식탁의자에 앉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모방의 귀재라 어른이 하는 것은 다 따라 하기 때문이다.


꼭 있어야 할 물건과 없어도 되는 물건을 구분한다. 사야 된다면 좀 더 부피가 작은 것을 사고, 그래도 사야 한다면 좀 더 다양한 활용을 할 수 있게 단순한 것을 산다. 이것은 가성비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엇을 사든 곱하기 3을 생각해본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결국 웬만하면 쇼핑은 절제하게 된다.

특히 짧은 시간에 쓰고 망가질 물건이라면 아예 들이지 않는 거다. 자기 직전에 쇼핑앱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물건에 가장 취약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이것만 있으면 육아가 쉬워지는 마법 같은 물건이란 애초에 없다. 잠시 눈요기하다가 집안의 어느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사라지는 게 대다수다. 그렇기에 꼭 사야 할 것 같은 충동이 들면 일단 장바구니에만 담아놓고 하루를 묵힌다. 다음날 결제하려고 열어보면 이미 물건의 필요성은 사라져 있다. 없어도 사는데 지장 없는 물건이 세상에 너무 많은 게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그렇게 물건을 사지 않게 되면 소비가 절제가 되고 그러면 가족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재화의 낭비를 줄이게 된다. 무조건 줄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절제다. 쓰는 방법과 방향이 달라진 것뿐이다.


아이를 하나 키울 때의 소비가 대부분 물건에 대한 소비였다면, 아이가 셋이 되고는 물건보다 경험에 대한 소비를 늘렸다. 가족이 함께 누리는 경험에 대한 소비의 비중을 더 높이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는 대신 공원이나 놀이터에 가서 돗자리를 펴고 가져온 간식을 나눠 먹고 함께 뛰어논다. 아이들을 키즈카페에 데려가거나 새 옷을 사러 쇼핑센터를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에 쓸려 다니는 대신 옷은 물려 입히더라도 에어비앤비로 집을 빌려 며칠이라도 다른 지역에 우리 가족을 함께 둬본다.

물건이 주는 즐거움의 지속 시간은 짧지만 경험이 주는 즐거움의 지속 시간은 길다.

어쩌면 정서에 남아 평생을 간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에는 함께 있는 경험이 함께 보내는 시간만이 남는 거다.


그럴 순 없어.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또 자기 시간을 지키는 것도 사람들 몫이지. 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나누어 줄 뿐이다.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너희들은 시간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갖고 있단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_모모 (미하엘 엔데) p217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린다는 말을 읽으며 내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돌아봤다.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평범한 일상의 두 달과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르는 거다. 가슴으로 느끼는 시간만이 나에게 남아있고 느끼지 못하는 시간은 내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가장 좋은 것은 무엇보다 나의 유년시절을 다시 살아보는 경험을 해보는 거다. 아이들을 낳기 전에는 아파트마다 왜 놀이터가 있는지 이유를 몰랐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5살, 3살, 3살이니 나는 5살과 3살의 인생을 다시 살고 있다. 5살과 3살에게 놀이터를 가는 시간은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늦은 오후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미끄럼틀을 올라가고 시소를 타고 나뭇가지를 줍고 돌을 쌓고 고양이를 쫓아가는 시간. 목적도 과제도 없이 보내는 시간들. 이 시간들이 아이들을 자라게 한다.


이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나의 5살과 3살을 함께 경험한다. 구겨져 있던 나의 유년시절의 기억들도 아이들 덕에 다시금 다림질하듯 말끔하게 펴지는 느낌이다.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며 적절하게 반응해주고 집에 있는 익숙한 물건들을 갖고 놀게 하거나 집 밖의 자연환경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하루의 중요한 일상으로 보내고 있다. 아이를 위한답시고 물건을 검색하느라 아이와의 찐한 눈 맞춤을 못하는 것을 경계한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한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곳을 나도 함께 바라보고 싶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이 어린 시절이 얼마나 짧은지 잘 알기에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다. 빨리 크길 바라지 않는다. 자기만의 속도대로 커주길. 새싹에서 잎새가 나고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우고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기를 소망한다.


모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물이 가득 쌓여 있는 동굴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많은 보물은 점점 더 불어나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출구가 없었다! 어느 누구도 보물을 헤치고 모모를 구하러 올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자기가 여기 묻혀있다고 알릴 수조차 없었다. 모모는 그렇게 시간의 산, 땅 속 깊이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모모는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으면,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파멸에 이르는 그런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_모모(미하엘 엔데) p290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으면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파멸에 이르는 그런 보물은 바로 '시간'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고 싶다. 그렇기에 물건에 대한 소비보다는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경험에 더 많은 재화와 정성을 쏟고 싶다.


급한 것보다 중요한것이 뭔지를 기억하며 챙기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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