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삼 남매 사교육비는 준비했어?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 마주 보기

by 대강철저

어떤 질문은 한번 듣고 나면 계속 머리를 맴돈다.

내가 어제 들은 질문은 하루 종일 잊히지 않고 뒤통수에 오래 매달려 있었다.


삼남매 사교육비는 준비해놓고 있어?
애들 학교 가면 돈이 얼마나 드는데.. 둘만 키워도 학교 가면 교육비가 허덕이는데 너희는 터울도 짧은 셋이잖아. 인당 200씩 잡아도 모자르다니까.
지금 니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돈을 아껴. 총알을 아끼라니까.


현실적인 조언이라는 이름의 면도날이 멀쩡하게 굴러가던 나의 현재를 사정없이 할퀴었다.

쌍둥이가 두 돌이 될 때까지 간신히 힘든 시기를 버티고 이제야 찾아온 임시적인 평화를 감사히 즐기고 있는 나는, 이 질문을 받고 하루 종일 멍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 삼 남매 사교육비는 준비해놓고 있어?


꼰대 같아서 말하지 않았지만, 나도 대치동에서 초중고를 나왔지만 사교육은 그리 많이 받지 않고도 대학에 잘 갔다. 나의 경험을 토대로 반박하면 바로 '라테는'이 될 거라는 걸 알기에 말하진 않았고 아마도 그때랑 지금은 다르다는 답을 들을 것 같아 말하지 못했다. 사교육 그렇게 어릴 때부터 안 받아도 대학 가는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릴 수도 있으니까. 혹시 내가 적절한 사교육과 선행을 어릴 때 더 받았으면 돈을 더 잘 벌고 사회적으로 더 높은 지위에 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엇보다 나의 시대와 내 아이들의 시대는 다르니 나의 경험이 정답이 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들어서 반박하지 못했다.


얼마나 들지 모를 '사교육비'라는 커다란 형체의 무언가를 내가 외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에 커다란 코끼리가 있는데 이것을 외면하고 다른 구석에서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한편으론 그럼 대체 얼마나 준비하고 있어야 되는데? 싶어 반발심도 일었다. 사교육비가 충분히 없으면 애 셋을 키우면 안 되나? 준비 없는 부모인 건가.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가져야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애초에 아이를 키울 때 드는 비용을 정확히 따지고 예측할 수 있는 문제인가? 싶었다.


결국엔 돈인가?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떼어낸 생활은 상상할 수 없다. 육아도 커다란 사업임에 틀림이 없다. 자본금이 부족한 사업은 시작부터 난관이 많으니까. 우리는 어느 정도의 리스크까지 감당할 수 있는 사업을 시작한 건가 감이 안 왔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야 될까 봐 겁이 났다.


일렁이는 불안을 마스크 속에 꼭꼭 숨겨두었다가 퇴근하고 온 남편에게 보따리를 풀듯 풀어헤쳤다.


여보, 00가 그러는데 애들이 초등학교만 가도 인당 200씩은 든대... 거기다 영유 보내면 유지하느라 더 들고... 우리도 지금부터 애들 사교육비 모아놔야 되는 거 아닐까? 우리 지금 여행 비용이나 외식 비용 이런 거 아껴야 되는 거 아닐까... 아니 당장 내년부터 **이 영유 보내야 되는 거 아닐까...


두서없는 나의 말을 한참 동안 듣고 있던 신랑은 몸서리치는 나를 달래며 말했다.

(**이는 우리 첫째 딸이다)


여보, **이를 봐. 우리가 시켜서 저렇게 혼자 하는 거야? 우리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끊임없이 배운 걸 이야기하고 복습하고 재밌게 배워가잖아? 우리가 만약에 학습지다 뭐다 붙잡고 매일 시키면 **이가 저렇게 스스로 재밌게 놀이하듯 할까?
나는 **이가 유치원에서 배워온 걸 혼자 계속 리마인드 시키면서 노래도 부르고 퀴즈도 내고 따라 하고 이런 과정만으로 지금은 충분하다고 생각해.
여기다가 뭘 더 시키면 과부하되지 않겠어? 여보도 배워서 알잖아. 에릭슨의 발달단계. **이는 지금 만 4세니까 '주도성'이 길러지는 시기야. '근면성'이 되려면 아직 1~2년 더 남았고...

내가 의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봐서 일수도 있는데, 나는 무언가 좋은 것을 들이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해로운 걸 하지 않는 거라고 봐. **이가 지금 우리가 시키지 않아도 즐겁게 하는 이 과정을 천천히 스스로 이끌어가도록 두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

여보나 나나 공부해봐서 알잖아. 결국에는 스스로 동기부여가 돼야 끝까지 할 수 있는 거란 걸.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끝까지 풀어내는 거는 엄마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야. 결국엔 스스로 해내야 하는 거지.
**이가 스스로 동기 부여하는 과정에서 뭘 자꾸 쏟아부으려고 하지 말고 조금 덜한다는 느낌으로 조금씩 밑에서 위로 올려주자. 즐겁게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좋은 것을 들이붓는 것보다 해로운 것을 안 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말을 들으며 문득 루소의 <에밀>에 나오는 이 구절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준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서둘러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다... 읽고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염증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아직 학문을 사랑할 수 없는 아이에게 학문을 싫어하도록 만들지 말아야 한다.

_<에밀> (루소)


결국에는 같은 말이다. 읽고 쓰기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염증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 학문을 사랑할 수 없는 나이에 섣불리 들이부어 학문을 싫어하도록 만들지 말라는 것.

어른이 봤을 때 좋아 보이는 것들을 들이붓느라 아이에게 해로운 것을 함께 주입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뿌연 흙탕물 속에 있느라 잊었다고 생각한 중요한 원칙들이 먼지가 다 가라앉고 떠오르는 맑은 물처럼 또렷해졌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좋다고 우기며 떠안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즐겁게 생활하면서 생활 속에서 만나는 배움을 스스로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게 조절해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해로운 것을 안 하도록. 아직 아닌 것을 하지 않도록.


한편으로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버티며 나의 길, 우리 가족만의 길을 걸어간다고 믿고 있었는데, 내가 아이들의 교육비에 관한 질문에는 항상 불안을 느낀다는 것을 자각했다. 왜 이 질문에 불안을 느끼는지 생각해봤다. 외면하려는 고개를 돌려 마주 보았다.


앞으로 돈이 얼마나 들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에듀푸어가 되거나 나의 삶을 통째로 보류하고 아이의 교육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하다 보니 어느덧 이 질문으로 끝맺음이 되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바라는 모습이 뭘까?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길 원하는가?


어느 곳에 떨어뜨려놔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적응력, 자립심, 독립심, 자기 주도성, 회복탄력성 이런 것들을 가진 어엿한 한 명의 인간으로 자라길 원한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도전하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성장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나의 육아의 최종 목표는 아이들의 독립이니까.



이런 건 어떻게 가르치지?


우리가 이미 몸소 가르쳐주고 있지.
여보가 이미 모범이 되고 있잖아.


남편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화목한 부모로서 하나의 독립된 가정을 이끌며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모습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방법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내가 먼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고 독립심과 자기 주도성과 회복탄력성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가르칠 수 있는 기예인 것이다.


말로는 글로는 가르쳐줄 수 없다. 오로지 몸소 보여주고 몸소 보고 배움으로써 그렇게 터득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어쩌면 육아라는 것은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원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방향을 설정하고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하나의 성장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아이들을 만난 것이다. 아이들을 돈 먹는 하마로 바라보면 그렇게 된다. 아이들을 함께 성장하는 인간으로 바라보면 그런 인간으로 자란다. 나는 함께 성장하는 인간을 바라보고 싶다. 어쩌면 외로울 수도 있었을 삶에서 이렇게 함께 성장하는 어린 생명들을 만난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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