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을 배운 것을 이런 데에 써먹을 줄이야
어릴 때 수학을 깊이 배운 것이 육아에 무슨 도움이 될까?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수학을 가장 오래 붙들고 공부했고, 대학 4년을 수학교육을 전공했고, 국가 임용시험을 통과해 고등학교 수학교사가 된 지 13년 차다.(물론 이중에 실근무는 8년이고 5년째 휴직 중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수학이 나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육아휴직을 내리하며 갑자기 수학을 공부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돌아보았다.
놀랍도록 도움이 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든 큰 틀과 구조를 파악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문제 상황을 만나면 이것이 어느 구조에서 나온 문제인지 본다.
수학을 배울 때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문제 상황에서 답이 없으면 답이 있는 세상으로 확장한다는 것이다.
답이 없는 문제도 맥락을 확장하면 답이 나온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자연수의 세계에는 없는 답을 정수로 확장하면 답이 나오고(x+2=0)
정수의 세계에는 없는 답을 유리수로 확장하면 답이 나오고(2x-1=0)
유리수의 세계에는 없는 답을 실수로 확장하면 답이 나오고(x^2-2=0)
실수의 세계에는 없는 답을 복소수로 확장하면 답이 나온다(x^2+1=0)
이 과정을 따라가는 과정이 대수학(algebra)이다.
수학을 오랫동안 공부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내 손과 머리에 배어있어서 인생에서 만나는 문제 상황에서도 답이 없으면 답이 있는 문제 상황으로 문제를 확장해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가 없을 때의 문제 상황과 아이가 하나일 때의 문제 상황은 다르다.
아이가 하나일 때의 문제 상황과 아이가 갑자기 셋이 된 문제 상황은 전혀 다른 맥락의 문제 상황이다.
나는 아이가 없을 때 아이가 하나일 때 아이가 셋 일 때 만난 문제들을 대할 때마다 새로운 수의 범위에서 답을 찾아가듯 문제가 가진 맥락을 확장시키려고 했다.
자꾸만 아이가 없을 때와 비교한다던가, 아이가 하나일 때와 비교하는 것은 답이 안 나온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것이 수학적 사고임을 최근에 깨달았는데 그것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서였다.
148. (케플러가 만든 sf소설인) <꿈>은 상상 속의 달 여행을 그린 소설로서 거기에는 우주여행객들이 달 표면에 서서 달의 하늘에서 아름다운 행성 지구가 천천히 자전하는 광경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관점을 바꿔봄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작동 원리를 알 수 있다. 케플러가 살던 시절의 사람들이 지구가 돈다는 생각을 거부했던 첫째 이유는 아무도 그 회전을 느낄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케플러는 <꿈>을 통해서 지구의 자전이 가능한 일이고 멋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임을 알리려고 애썼다.
관점을 바꾸면 세상의 작동원리를 알 수 있는 것이 과학적 사고방식의 원리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지구에 살고 있기에 지구라는 맥락에서 벗어나서 사고할 수가 없는 거였다. 케플러는 사람들에게 지구에서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달에서 바라보면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관점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아이 하나를 키울 때는 변수가 하나이다. 그런데 아이가 셋이면 변수가 3개가 된다. 1차원의 문제에서 3차원의 문제로 상황이 바뀌는 거다. 다둥이 육아에서 만나는 문제 상황은 예를 들면 이러하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아이의 요구에 맞춰 주말을 계획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억해두었다가 함께 쇼핑을 하러 간다거나 원하는 곳에 데려가는 식이었다. 아이가 셋이 되자 첫째와 쌍둥이 동생들의 요구가 서로 달랐다. 처음에는 어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미안함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우리가 어떻게 해도 셋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째는 놀이공원에 가고 싶지만 쌍둥이는 기어 다닌다. 이 상황에서 놀이공원을 가면 첫째는 첫째대로 힘들고 쌍둥이들은 쌍둥이대로 힘들다.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아이들이 주말에 쇼핑을 안 해도 놀이공원에 안 가도 셋다 만족할 수 있는 맥락을 찾으려고 했다. 가만 보자. 4살 딸과 2살 아들 둥이는 어디에 풀어놔야 될까. 아이들이 원하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최적점을 찾아보았다. 그제야 배경처럼 보이는 산과 공원들이 보였다.
열심히 숲과 공원을 찾아다니는 주말을 보내다가 이것이 우리 가족의 주말 루틴이 되었음을 느낀 날 일기를 썼다. 그 일기에는 우리 가족만의 정답이 있다. 그대로 가져와본다.
2021.11.10
우리 아이들은 아침에 눈뜨면 나가자고 신발부터 들고 오는 나이인지라 주말은 늘 외출을 하는데 언젠가부터 ‘근린’이 붙은 곳에 가면 아이들과 함께 있기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린을 검색해서 나오는 각종 근린공원들 중에 한 곳을 고르고 간식과 물과 커피를 간단히 싸서 출발한다.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한적한 잔디밭이나 놀이터 근처에 캠핑용 간이 의자를 편다. 잔디와 나무로 이루어진 곳에 아이들을 내려두면 한참을 뛰어다니며 논다. 언젠가부터 실내보다 이런 실외, 특히 자연이 함께 있는 곳이 좋아졌다.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였을까, 아니면 코로나로 인해 실내 활동을 꺼리게 돼서였을까. 아마도 둘 다인 것 같다.
매주 밖으로 나가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더 실감한다. 아이들이 자고 일어나면 쑥 커져있듯, 나무들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싱그러운 초록 잎이 한창이었는데, 지금은 울긋불긋 해지고, 비 오고 난 뒤에 보니 어느새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었다. 매일 지켜보고 있는데도 눈앞의 마술처럼 휘리릭 없어지거나 생겨서 놀란다.
우리 동네 뒷산에 데크길이 생긴 후로 나는 발자국을 새길 기세로 매일 산에 오르게 되었다. 쌍둥이 유모차를 밀고 산에 가게 된 건 가슴속의 갑갑함이 가시지 않아서였다. 완만한 데크길이 길게 이어져 있어 밀고 나가다 보면 산의 모습이 휙휙 바뀐다. 그렇게 바뀌는 배경처럼 내 머릿속도 한 번씩 뒤집어주고 싶었다.
데크길을 쭉 걷다 보면 나무 그늘 사이로 새소리도 들리고, 다람쥐들도 보이고, 은은한 꽃향기도 바람에 실려 날아온다. 자연이 무엇보다 큰 위안이 된다는 걸 그때 느꼈다. 처음 보는 산새가 유모차 가까이에 살포시 앉아있길래 조용히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아이들이 이런 장면을 나중에 기억하지는 못하더라고 정서에는 남아있길. 힘들 때는 조용하고 푸근한 자연 속에서 쉼을 찾기를 바라보았다.
집에 있기에는 갑갑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짐을 싸다 보면 몸이 나른해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막상 나와서 초록 초록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며 기분이 상쾌해진다. 햇빛을 받아 자라는 나무처럼 나도 광합성을 하듯 햇빛 아래에 앉아 본다. 햇빛 아래에선 어디서든 골고루 빛과 온기가 퍼져나가듯, 아이들에게도 나의 시선을 골고루 비춰본다. 뭔가를 애써서 들이부어야만 아이들이 커가는 게 아니라, 그저 햇빛처럼 늘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자란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 하나를 키울 때에는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려고 노력했었다. 그것 또한 좋았다. 재미와 보람이 있었고 시간이 잘 갔다. 막상 쌍둥이 동생이 태어나고 코로나로 실내 활동에 제한이 생기고 나서야 우리는 배경화면처럼 보였던 공원과 뒷산의 진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너른 배경화면이 되어주는 숲과 공원들. 목적도 활동도 없지만 그저 그 속에 있으면서 몰입하게 되는 자연의 숨소리에 우리는 서서히 위안을 받았다. 가까이에 푸른 숲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것도 내가 가꾸고 다듬고 치워야 하는 의무의 공간이 아니라, 가서 느끼고 숨 쉬고 잠깐 소풍 가듯 들렀다 올 수 있는 곳이라 더 좋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나는 더 부지런해지고 건강해졌다. 아이들을 위해 산으로 나오고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결국에는 나에게도 몸의 환기와 기분전환이 되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주말 아침에 이렇게 부지런히 뒷산을 올랐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결혼 전의 주말이 떠오르면서 빙그레 웃게 된다. 주말 '아침'이란 없었던 그 시절. 눈뜨면 점심 먹을 시간이었던 그 시절에 비하면 이 얼마나 건강한 생활방식인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나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내 스스로를 건강히 돌보고 나를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들 덕에 건강한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아이가 셋이기에 내려놓게 된 많은 것들을 돌아보면 오롯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아이들은 부모가 주말에 어디를 데려가서 무언가를 해주는 것을 원한다기보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위안과 사랑을 느끼며 자란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공짜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심장이 걸어 다니는 것만 같다.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웃을 때 가슴속에 벅찬 감정은 값을 매길 수 없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경험도 많은 비용이 있어야만 그 감동이 늘어나는 게 아니다. 아이들과 온전히 함께 있는 경험, 자연 속에 같은 공기를 느끼는 경험, 흙을 만지며,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 다니는 새와 동물들을 보며, 말없이 서로 바라보며 웃으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몸과 마음을 키우는 영양소가 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아이들을 키우는 동시에 나 자신도 여물게 한다. 아이들과 함께 오는 이런 숲과 공원들이 모두 공짜임에도 매번 놀란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그것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만 가치 있다.
코로나라는 갑작스러운 전염병의 시대에 5인 가족이 된 우리는 어느 순간 그렇게 숲으로, 공원으로 아이들과 함께 나가 걷고 느끼는 일상으로 주말을 채워갔다. 신기한 건 어디 앉을자리가 없는지를 찾는 것은 어른인 우리 부부일 뿐 아이들은 앉을자리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엉덩이가 가벼운 걸까. 앉기보다 서 있으려고 하고, 서있기보다 돌아다니려고 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궁금증도 호기심도 많은 아이들, 새가 우는소리만 들려도 동시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짹짹~짹짹!" 외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온 세상이 경이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하기만 하다.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요즘 산과 공원을 다니며 느낀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도 어쩌면 자연 속에서 푹 빠질 수 있는 시간과 무언가 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여유가 아니었을까.
첫째만 있을 때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곳이었지만 동생들이 생기고 나서는 이런 야외가 더 좋아진 경험. 이것이 나는 맥락을 바꾸고 나서야 정답을 찾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아이라는 변수가 생기고 나서 우리가 평소에 쓰던 간편한 답이었던 쇼핑몰, 키즈카페, 놀이공원이라는 해답을 버리고 새로운 답인 산과 공원을 찾은 것이었다. 기존에 가던 키즈카페를 못 가는 것에 첫째에게 미안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 우리의 상황이 변했고 정답은 다른 맥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까.
마찬가지로 쌍둥이들이 장난감 하나를 두고 싸우는 경우에 간편한 해답은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사주는 것이다. 그러나 누나 것을 가지고 둘이 싸운다거나 같은 걸 사줘도 하나로 싸운다거나 하는 경우들을 마주하며 '똑같이 사준다'는 것이 정답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간편한 답을 버리고 최적의 답을 찾다 보니 아이들에게 순서를 알려주고 지키라고 말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줄을 서시오!"이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장난감이 있거나 놀이가 있어서 서로 싸우면 일단 줄을 서게 한다. 줄을 선 순으로 순서를 지켜 놀잇감을 가지고 놀게 하는 거다. 이 과정에서 첫째가 하는 말에 놀라움을 느꼈다. 동생들이 자꾸 오래 갖고 놀자,
긴 바늘이 1이 갈 때까지만 하고 누나한테 줘
라고 말하는 거였다. 첫째는 시계를 아직 볼 줄 모르고 쌍둥이는 뭐 말해 무엇하랴. 그럼에도 누나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따르려는 동생들과 어떻게든 동생들과 함께 나눠 가지며 놀려고 하는 첫째를 보며 우리 집만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 같아 재미가 쏠쏠했다.
예전에 학생들이 수학이 나중에 살아가는데 뭐가 필요하냐고 물어본 적이 많았다.
그때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수학적인 사고방식, 과학적 사고방식이 실제로 인간의 생활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문제 상황을 관점을 바꿔가며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네가 어떤 삶을 살든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답이 없는 문제들을 마주하게 될 거야. 그때 지금 수학으로 키워놓은 생각의 근육들이 너를 더 큰 맥락으로 확장해서 사고하게 도와줄 거야.
이 말을 복직을 해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릴 때 배운 수학을 다 커서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육아에도 써먹고 있다.
육아에서 만나는 답이 없는 문제들을 대할 때마다 이것이 수학 문제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답이 없으면 답이 있는 맥락으로 바꾸자고.
그러면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정답을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