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를 낳고 인생이 폈다

인생사 새옹지마

by 대강철저

쌍둥이 임신 중에 친구들과 1박 호캉스를 다녀온 적이 있다. 남편이 첫째를 봐줄 테니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라고 흔쾌히 말해주어 고마웠다. 20년 지기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밤새도록 실컷 수다도 떨고 놀면서도 매 순간이 아쉬웠다.


나 인제 당분간은 이런데 못 오겠지?


침울해하는 나를 친구들이 위로했다.


애 키우고 또 오면 되지! 아님 남편에게 지금처럼 맡기고 또 오자!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를 셋이나 맡기고 나올 순 없지...


나무꾼이 선녀에게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선녀 옷을 돌려주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러니까 아이 셋이 되면 제아무리 선녀라도 자기 있던 곳으로 못 돌아가는 거다. 나는 선녀는커녕 일개 미물인 주제에 애를 셋이나 낳다니. 내가 지금 감당할만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건가 싶었다.


임신 기간 내내 미래를 생각하면 앞이 깜깜했다. 친구들과 호캉스를 다녀온 날 저녁에 남편과 함께 <캠핑클럽>을 보는데 그들의 대화를 보며 전날에 본 친구들의 모습과 겹쳐 눈물이 왈칵 났다. 나도 이제 친구들과 저렇게 자유롭게 만나려면 대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나는 쌍둥이 임신기간 동안 늘 우울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앞으로는 내 인생이 아이들만 키우는 감금의 생활이 될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이미 첫째를 키우며 육아를 해봤기 때문에 더 무서웠던 것도 있었다. 원래 아는 고통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쌍둥이를 낳은 날 중국에서 우한 폐렴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전염병이 나왔다고 뉴스에 떴다. 조리원에서 마스크를 주더니 끼고 다니라고 했다. 조리원에서 돌아와 집에 오고 나서 둘러보니 온 세상은 세기말처럼 스산했다. 끝을 알 수 없는 감금이 시작되었다. 바깥세상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급증하는 확진자수를 확인하느라 매일 아침 눈뜨는 게 두려웠다. 전염병의 확산 속도가 빨라지고 마스크 사재기가 생기고 사망자수가 늘어나고 있는 와중에도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혹시나 택배 중단으로 분유가 떨어질까 하는 걱정이었다. 이른 단유를 후회했지만 이미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단유를 후회하다 보니 자동으로 드는 생각.

내가 어쩌자고 이런 시국에 아이를 낳았을까. 그것도 둘이나. 임신 기간의 우울이 출산 후 우울로 이어지는 듯했다.


첫째 딸에 이어 아들 쌍둥이까지 생기고 나니 나는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가정에서 한참 동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어린아이 셋을 키운다는 것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노 키즈존은 물론이고 호텔 숙박이 안된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고 차도 7인승은 돼야 온 가족이 이동이 가능했다. 식당에 가도 대부분 4인석이고 아기의자는 부족하기 일쑤였다. 애초에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 자체를 안 가게 되기도 했다. 일상의 자잘한 불편함이 많아졌다. 3인 가정일 때는 전혀 몰랐던 불편함이었다.


두 손에 애 하나씩 손잡고 나가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는 손이 두 갠데 애가 셋이라 아이 셋을 혼자서 동시에 데리고 나가본 적이 없다. 집 앞의 놀이터를 가려고 해도 도움이 필요하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는 아이가 하나가 딱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일을 다시 시작하면 우리 아이들의 등하원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을까. 엄마가 아닌 어느 누가 애를 셋이나 한꺼번에 등원시킬 수 있을까.


그런데 인생은 예상대로 되지 않아서 재밌다.

다둥이 엄마가 되고 내가 잃게 될 것에만 속상해하고 있었는데 막상 살다 보니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는 걸 서서히 깨닫고 있다.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쌍둥이를 낳고 인생이 폈다고.

5인 가족이 되고서 진정한 우리 가족만의 아이덴티티를 찾게 되었다고.


첫째를 낳고 키울 때에는 어떻게든 사회에서 말하는 평범한 육아의 기준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열심히 검색해서 국민장난감을 들이고 조리원 동기모임을 나가고 친구를 만나고 아이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다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애를 키우나 궁금해하며 육아서를 쌓아놓고 읽고 맘 카페를 검색하고 좋아 보이는 것들을 따라 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러면서도 애 낳기 전의 나의 모습을 잃을까 봐 사람들을 열심히 만나러 나다녔다. 애 낳은 엄마 같지 않다는 말을 칭찬으로 듣고 헤벌쭉하게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쌍둥이를 낳고는 이게 안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니까 애 없을 때처럼 산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기존에 하던 대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거였다. 아이가 셋인데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옷을 솔기를 뜯어가며 억지로 입는 것과 같았다.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애를 어떻게 키우는가에 대한 관심을 줄이게 되었다. 육아서도 맹신하지 않게 되었는데 '동생이 생긴 첫째를 위한 책'으로 유명한 육아서를 읽다 보니 우리 아이들은 터울도 제일 안 좋다고 한 24개월이었다. 임신 중에 이 책을 읽으며 첫째에게 24개월 동생을 둘이나 한 번에 주게 된 나는 죄책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막상 낳아보니 책과 달리 우리 아이들에겐 딱 좋은 터울이었음을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애초에 육아는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나만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첫째를 키울 때만 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시기가 복직 전에 잠깐 거쳐가는 시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쌍둥이 출산으로 휴직은 그저 유예된 시기라고 하기엔 너무 긴 시기가 되었고 그제야 나는 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임신과 출산의 과제가 없어진 것도 한몫했다. 나는 달리는 말에서 멈추고 내려와 앉아 스스로를 골똘히 바라보게 되었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사람들과의 만남을 제한하기 때문에 더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어떤 것을 좋아하지? 사춘기에나 했을법한 질문을 이제야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그렇게 나를 탐구하다 보니 자동으로 나를 둘러싼 환경인 가족을 함께 바라보게 되었고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만남이 주는 풍요로움의 진가를 서서히 알게 되었다. 만약 쌍둥이 동생이 없었다면 첫째는 이런 시국에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을 거다. 동생들과 함께 하면서 아이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는 게 즐거웠다. 첫째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은 아이라 더더욱 그러했다. 동생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엄마 아빠가 하는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쌍둥이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누나의 행동을 관찰하고 모방하면서 우리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함께 노는 법을 익혀갔다. 어린 영유아 셋이 함께 커가는 가족의 모습은 주변에 없었기에 나는 우리 가족만의 기준을 새롭게 만들게 되었고 '다른 평범한 가족'이라는 이상을 버리고 나니 나의 가족만의 문화를 만드는 것에 더 자유로워졌다.


아이들끼리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에서 느끼는 충만함으로 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서서히 긍정적으로 바뀌어갔다. 아이들이 서로에게 주는 영향력과 그로 인한 변화를 관찰하는 과정 또한 즐거웠다. 인간의 성장에 대해 관심이 생기고 적극적으로 탐구해보고 싶어졌다. 이런 생명의 에너지는 삶의 활기로 이어졌다. 스스로를 키우는 과정이 결국에는 육아의 일부임을 알게 되었고 육아를 통해 나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갔다. 아이가 누리길 바라는 삶을 생각하다 보니 내가 먼저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도 가족이 의미가 있을까? 자식은 부모에게 영원한 빚쟁이로 돈을 들이부어야만 키울 수 있는 존재인가? 이런 회의가 들 때마다 가족의 새로운 역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나의 가족의 문화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히려 최첨단 가족>(박혜윤)을 읽으며 나는 나만의 가족을 실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2. 나는 우리 가족이 이런 부족의 정서 상태를 조금이나마 가지길 바랐다. 가족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기능하게 만드는 소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이런 사회가 주지 못하는 원시적 부족민으로서의 소속감을 제공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부모는 성실히 부양의 의무를 다하고, 아이들은 미래의 경쟁력을 위해 공부함으로써 은혜를 갚는 '거래'의 형태가 아니라, 자유로우나 충성스러운 원주민과 같은 공동체 말이다.

48. 내가 새로 만드는 가족도 이런 식의 느슨한 관계이기를 바랐다. 나는 아이를 낳아 또다시 핵가족을 만들기 위해 결혼했는데, 행복해지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서로에게 더 나아지거나, 더 채우거나, 더 좋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 없이 관계가 저절로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이해만으로 가족을 지탱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행복을 구하지 않고, 의무도 없으며, 더 발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냥 현재의 나로도 충분한 관계가 가능할지 궁금했다.

50. 지금까지의 가족이 더 많은 재산을 모으고 더 경쟁력을 갖춘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면, 앞으로의 가족은 (여전히 존재한다면) 더 발전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여도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주는 관계여야 할 것이다.

_<오히려 최첨단 가족>(박혜윤) 앞의 숫자는 페이지.


가족은 더 발전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여도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주는 관계여야 한다니.

나는 내가 꿈꾸는 가족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슨하지만 끈끈한 연대를, 자유롭지만 충만한 관계를 우리 가족 안에서 이끌어낼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나로서 온전히 살면서도 가족이라는 연대 안에서 안정을 느끼며 충분히 자유로운 관계. 이러한 관계를 우리 가족 안에서 서서히 만들어가면서 나는 스스로가 더 마음에 들어졌다.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매일 아침 기대에 차서 눈을 뜬다. 일상의 소중한 루틴을 만들고 실천해가며 하루를 충만하게 보내게 되었다.


내가 올곧이 두 발로 서자 남편과의 관계도 한층 더 발전했다. 남편에게 기대거나 아내에게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 두발로 서서 서로를 북돋아주는 관계가 되자 작은 것에도 서로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가 아이를 셋이나 낳아서 기르다니. 크게 무언가를 해주지 않아도 매일 대나무처럼 쑥쑥 커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경이롭다. 아이들이 사랑스러우면 남편에 대한 애정도 커진다. 서로가 아니었으면 할 수 없었던 일임에 늘 감격스럽다. 우리의 관계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아이들에게도 늘 고마운 마음이 든다.


집에서 키우던 말이 사라지자 그 멋진 말을 잃어버려 어떡하냐고 위로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새옹은 이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지 않냐고 얘기했다. 결국에 그 말은 다른 말 여러 마리를 몰고 왔다는 게 새옹지마의 이야기다.


인생사 새옹지마.

말을 잃은 줄 알았지만 더 많은 말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갑자기 쌍둥이의 임신으로 앞이 캄캄해지고 아무도 내 인생을 뺏은 사람이 없는데도 뺏긴 것 같았는데 잃었다고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이처럼 인생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어 재밌다.


나는 앞으로의 내가, 앞으로의 우리가족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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