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셋이 되자 육아서를 갖다 버렸다

아이의 고유성을 인정해주기_<평균의 종말>을 읽고

by 대강철저

주말 동안 24시간 붙어있다 보니 아이들이 자기만의 색깔로 삶을 대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인간은 하얀 백지와 같다고 표현한 존 로크는 분명 아이를 손수 키워보지 않았을 거다.

백지는 무슨. 같은 뱃속에서 나와도 색색깔 무지갯빛이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피아제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피아제가 자기 자식 3명을 관찰하며 인지발달이론을 만들었다는 점이 새롭게 보였다. 나도 나의 세 아이를 매일 관찰하면 아이들의 발달이 각자 다르다는 것에 놀란다. 내게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두드러지게 보이는데 그건 아마도 여자아이를 한 명 키우는 경험과 남자 쌍둥이를 키우는 경험의 차이 때문이리라. 더구나 똑같은 날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두 남자아이가 같은 환경에서도 전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보는 신기함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쌍둥이 중 형인 둘째는 18개월이 될 때까지 기어 다녔다.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면 잡고 걷긴 했지만 스스로 일어나질 못했다. 12개월 영유아 검진에서 대근육 검사 0점을 받고 나서야 우리는 대학 병원 진료를 받기로 했다. 아이들이 태어난 대학 병원에 다시 올 줄이야. 담당 의사 선생님은 만 18개월이 될 때까지 운동치료로 연습하며 기다려보되 18개월이 넘어도 안 걸으면 뇌 MRI를 찍어보자고 했다. 아무 이유 없이 18개월이 될 때까지 못 걷지는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덧붙이며.


나는 둘째를 데리고 매주 대학병원에 가서 받는 운동치료가 버거웠는데 그건 아마도 체력적인 이유라기보다 심리적인 이유였던 것 같다. 그곳에 가서 운동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아이의 발달이 느리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대학병원이란 으레 상황이 심각한 아이들이 모여있기에 치료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를 얹은 듯했다. 내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눈치챈 남편이 대신 치료실을 다녀주었다. 꼬박 7개월을 매주 다니고 마지막 한 달은 주 2회로 운동치료를 늘려도 딱히 눈에 뜨이는 변화가 없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물론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이가 스스로 서서 스스로 걷길 원했기에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였다. 그런데 뇌 MRI를 찍기로 예약한 날을 일주일 남기고(정확한 날짜도 기억난다.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 전날까지는 억지로 일으키지 않으면 서 있지도 않던 아이가 갑자기 기는 자세에서 엉덩이를 치켜세우더니 손을 바닥에서 떼서 혼자 일어서더니 한 걸음씩 내딛기 시작했다. 넘어지면 다시 엉덩이를 추켜세우고 또 손을 떼고 서서 발걸음을 떼었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걷고 다시 넘어지고를 반복하느라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걸으려고 계속 애를 쓰더니 그날부터 갑자기 두발로 걷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기만 하던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고 일어나자마자 걸음을 떼고 걷는 걸 보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이렇게 갑자기 걷게 되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미 다른 두 아이를 키우며 걷는 과정을 지켜봐 왔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걸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18개월을 기기만 하다가 중간 과정을 몽땅 생략하고 갑자기 하루 만에 걷다니. 이렇게 걷는 아이도 있다는 걸 몰랐다.


첫째는 14개월쯤 스스로 걷기 시작했고 쌍둥이 동생인 셋째는 돌이 되자마자 걷고 걷자마자 뛰기 시작한 아이였다. 그에 비해 18개월이 되도록 스스로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는 둘째 때문에 속앓이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단 하루 만에 아이가 스스로 걷게 되다니... 심지어 늦게 걷기 시작해서 그런지 막상 걷게 되자 잘 넘어지지도 않았다. 뇌에 문제가 있어서 못 걸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불안감이 단 하루 만에 날아 가버린 거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이렇게 내 뱃속에 나온 세 아이의 각각 다른 발달의 차이에도 당황스러웠던 거였다. 왜 아이의 발달이 이렇게 제각각이지?


<평균의 종말>(토드 로즈) 책에서 비슷한 사례가 나왔다. 발달은 각 아이들마다 다르고 정형화된 걷기란 없다는 것을. 어떤 아이들은 기는 단계 없이 걷기도 한다고 했다. 이제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정상적인 경로에서 규정된 대로라면 기어 다니기는 특정한 순서대로 특정 단계를 따라야 맞았다. 하지만 아돌프가 실제로 조사해보니 몇몇 아기들은 여러 단계를 동시에 나타내거나 여러 단계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거나 아예 일부 단계를 건너뛰기도 했다. 한 예로 배밀이는 기기의 필수적인 단계여서 아기들이 걸음마를 떼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치게 되는 단계라는 것이 오래된 믿음이었으나 아돌프가 조사한 아기들의 절반 가까이는 배밀이를 전혀 하지 않았다.

“모든 아기는 몸 움직이기 문제를 저마다 독자적인 방식으로 풀어갑니다”

훨씬 더 도발적인 얘기를 덧붙이자면, 기어 다니기는 그 터득 방법이 여러 가지일 뿐만 아니라 기기 자체가 걷기 과정의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단계가 아닐 수도 있다. 기기가 걷기 전의 필수 단계라는 개념은 문화적 산물이다. 아주 비정상적인 표본 집단을 토대로, 즉 산업화된 서구 사회 아이들의 행동을 표본으로 삼아 표준화한 결과다.

_<평균의 종말>(토드 로즈) p186


이어지는 내용은 파푸아 뉴기니의 오Au족 이야기인데 오Au족에서는 어떤 아기도 기어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엉덩이 끌기' 단계 후 바로 걷기를 하는데 그 이유는 바닥에 기면 기생충의 감염의 위험 때문에 부모들이 아이를 업고 다니거나 바닥에 놓더라도 엎드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기기는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단계가 아니라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는 내가 세 아이를 키우면서 머릿속에 이상적인 아이의 발달과정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종 모양의 정규분포의 배치에서 아이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늘 염두에 두고 평균보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끊임없이 측정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떻게든 평균보다는 더 높기를 바라면서.


그러니 둘째의 대근육의 발달이 느리다는 사실이 내게는 너무나 고통이었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끔찍한 상상을 하느라 일상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그맘때는 첫째의 빠른 언어 발달도 셋째의 놀라운 달리기 실력도 온전히 기뻐하지 못했다. 오직 아픈 손가락인 둘째의 발달지연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런데 둘째는 누나와 동생과는 다른 자기만의 방식으로 걷는 과정을 가고 있는 거였다. 그때 이걸 알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병원 진료는 받았을 거고 운동치료도 받긴 하겠지만 그렇게 괴로워하며 다닐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자기만의 방식과 속도대로 간다는 것을 알고 운동치료를 받았다면 헬스를 하러 간다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다닐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면서 다녔을까 싶어 아쉽다. 돌아보니 그즈음 첫째도 셋째도 자기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발달과정이 다양하다는 것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관찰했으면 얼마나 재미났을까.


<평균의 종말>을 읽으며 더 이상 아이들을 종형 그래프상의 위치로 파악하지 않고 개개인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의 개성을 존중해준다는 뻔한 말이 아니라 아이의 특성이 평균이라는 수치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고유함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평균이라는 개념 때문에 아이에게 적합한 판단이 아닌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책에서는 강조했다. '평균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을 비교할 경우라면 평균이 유용한 역할을 해줄 수 있지만 어떤 개개인과 관련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라면 평균은 쓸모가 없음을 강조한다. 오히려 평균이 허위정보를 제공하는 격이라며.


이어지는 글에서는 평균이라는 개념을 대체할 개개인학에 의거한 3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들쭉날쭉의 원칙, 맥락의 원칙, 경로의 원칙이 바로 그 답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인간의 재능, 지능, 성격, 창의성 등은 거의 모두가 다차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여러 차원들 사이의 관련성이 낮다는 것이 들쭉날쭉의 원칙이다. 즉, 우리의 대다수가 다소 잘하거나 못하는 부분이 적어도 하나씩 있으며 하나를 잘한다고 해서 다른 것까지 잘한다고 볼 수 없다. 특히 지적 재능은 들쭉날쭉해서 IQ점수 같은 일차원적 값으로는 평가하거나 판단하기가 불가능하다.


둘째, 한 사람의 본질적 기질이란 없고 상황 맥락별 기질만 있다는 것이 맥락의 원칙이다. 이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는데 우리는 MBTI만 알면 그 사람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맥락의 원칙에 의하면 틀렸다. "모든 아동이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의 다른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경우든 행동방식이 개개인상황 모두에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도덕성과 자제력과 관련된 기질은 어느 상황에서나 일관된 본질적 기질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바뀌는 상황맥락적 기질이다. 이것을 스스로에게 적용시킨다면 내가 가장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상황과 맥락이 개개인별로 다르므로 이것을 찾는 것이 중요해진다.


셋째, 인간의 발달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단 하나의 정상적인 경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는 그리고 그 어떤 특정 목표를 위한 여정 역시도 똑같은 결과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이며 그 길은 저마다 동등한 가치를 갖고 있다. 당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경로는 당신 자신의 개개인성에 따라 결정된다."라는 것이 경로의 원칙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특히 해방감을 느꼈다. 나는 항상 정답을 찾으려고 했는데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는 내게 맞는 경로가 따로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왜 그렇게 많은 육아서들이 그렇게 내 아이에게는 무용했는가에 대한 답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육아서가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과 어쩌면 판단의 오류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특히 자기 아이를 키운 것을 토대로 정답을 제시하는 책들은 아마 그 아이와 그 아이를 키우는 맥락에서만 가능한 것이란 사실도 깨달았다. 또한 SNS상에서 아이에게 좋았다고 하는 책이나 장난감도 찾아보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좋았다고 해서 혹은 평균적으로 아이들이 선호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 아이에게 적합하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쌍둥이인 두 아들도 취향이 제각각이고 발달이 제각각이다. 나와 남편의 유전자의 조합이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올 수 있는가에 대해서 늘 놀란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개개인성에 맞는 자기만의 경로가 있다는것을 알고나니 다양성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부모가 그리는대로 커가는 하얀 백지가 아니다. 자기만의 색깔과 자기만의 시간으로 성장한다. 그것을 억지로 더 빨리 하게 한다거나 느리게 할 수는 없다. 자기만의 북소리에 맞춰 커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가 자신의 리듬에 맞춰 자연스럽게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응원해주는 것뿐이지 않을까. 나의 기준이나 혹은 평균이라는 척도에 맞춰 아이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아이의 기준과 아이만의 개개인성을 존중해주는 것이 내가 기억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다시 새겨본다.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역할을 다시 재규정해본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다. 정형화된 이데아를 규정하고 그것에 아이를 끼워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인간이란 없다는 것을 기억한다. 아이의 고유함을 인정한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존중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통해 세상에 나왔지만 이제는 나와는 다른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 특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부터가 아이가 평생 자신의 개개인성을 지키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시작.


아이를 키우며 가장 좋은 건 무엇보다 잊었다고 생각한 나의 유년시절을 다시 살아보는 경험인 것 같다. 나는 5살과 3살 아이들과 매일을 함께 보내다 보니 나의 5살과 3살을 다시 산다.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과 존중을 생각해보며 아이들을 대한다. 이제는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한 단 하나의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아이들 각각을 한 명의 인간으로 동등하게 대하며 그 아이가 자기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맥락과 상황을 살펴보려고 노력한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선이 명확해지자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나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스스로 한 명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육아의 핵심인 것 같다. 나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이 과정이 즐겁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