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중이고 어린이집에 보냅니다만
나는 세 아이 모두 돌 지나고 바로 어린이집에 보냈다.
내가 어린이집에 등록했다고 하자 들었던 말들은 어마 무시했다.
나는 나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어린이집에 다니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기에 보내기 시작한 거였다.
그런데 나의 이유와는 상관없이 어린이집을 보낸다는 사실만 듣고 엄마와의 애착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처음 보는 동네 할머니들조차 내게 할 말이 아주 많으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말도 못 하는 애를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어린이집에 보냈을 때의 장점에 대해 설명을 해도
그래 봤자 엄마랑 있는 게 더 좋을걸?
이제는 이런 말의 폭력성을 알기 때문에 발끈하며 응하진 않지만
누가 봐도 상처받으라고 하는 말들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애가 그렇게 어린이집에 오래 있어? 어린이집 가면 엄마는 뭐하는데?
엄마가 멀쩡히 집에 있는데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것은 직무유기 인양 말했다.
심지어 나의 친정 엄마는 내게 웃으며 종종 말한다.
니가 뭐가 힘들어, 어린이집에 다 맡겨놓고.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인 엄마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남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첫째 때는 그랬다.
나도 초보였으니까.
육아에 정답이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처음에 나의 선택을 의심하고 미리 걱정한 것에 비해 아이가 빠르게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며 왜 이렇게 사람들이 어린이집을 보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어린이집에 보내는 상황이 아니라면 엄마가 끼고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엄마가 24시간 끼고 키우는 것이 최선이고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차선이라는 말을 진리인 듯 얘기했다.
나는 이러한 기본 가정부터 의심이 들었다.
누구 입장에서 최선이란 말인가?
아이 입장에서? 엄마 입장에서?
정말 그러한지 궁금했다.
아이 입장에서 가정보육이 최선이라는 말의 근거는 대부분 '3년 애착 이론'을 든다.
'3년 동안 엄마가 끼고 키워야 아이의 심리가 안정된다'는 3년 애착 이론을 사람들은 진리인 양 믿고 있다.
실제로 이 연구가 고아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존 볼비가 고아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로 어릴 때 엄마가 없었던 아이들이 커서도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관찰하고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이후에 맺을 모든 인간관계의 원형이 된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일반적인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것이 아니다. 특수한 상황의 표본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일반적인 아이들에게 모두 적용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 3년 애착 이론은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고 살아남아 우리나라의 워킹맘과 어린이집을 보내는 엄마에게 죄책감의 굴레를 씌운다. 3년 내내 24시간 같이 있어야 아이가 정상적인 애착을 갖는다니까!
정말일까?
조금만 더 찾아보면, 조금만 더 책을 읽어보면 최신의 애착 연구를 알 수 있다.
애착 연구에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넓은 의미에서 아이의 관계는 독립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이다. 엄마와 안정적으로 애착을 형성한 아이라고 해서 아빠와도 안정적 애착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탁아 시설에서 교사와 안정적 애착을 형성했다고 해서 엄마와도 안정적 애착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애착의 안정성은 아이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맺는 관계에 존재한다. 아이이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작동 모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계를 움직이는 각각의 작동 모델이 존재한다.
아이가 맺는 관계가 크게 보면 독립적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다. 아이가 각각의 인간관계에 두루 적용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특징들(사교성, 상냥함, 준수한 외모 등)은 아이가 엄마, 아빠, 교사, 친구들 중 누구와 관계 맺든 영향을 미친다. 이 모든 관계의 주체인 아이의 유전자가 일관되기 때문에 애착 연구자들이 각 관계에서 상관관계를 발견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_<양육 가설>(주디스 리치 해리스) p233
<양육 가설>에 의하면 엄마와의 애착관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이는 엄마와의 애착관계를 그대로 다른 사람과 맺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람들과 각각의 관계를 맺는다. 아이는 백지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일관성이 드러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유전자가 일관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을 개인의 기질이라고 읽었다.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까지 나는 세 아이의 기본적인 기질과 성향이 어떠한가를 유심히 관찰했다.
첫째 아이는 여아로 언어가 빠르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집에서도 엄마에게 매달리기보다는 자기의 놀이에 집중하고 사부작사부작 정적으로 놀이 활동을 하는 아이였다. 어린이집에 처음 갔을 때에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새로운 환경을 관찰하고 어린이집 선생님께도 금세 마음을 열었다. 원래도 언어가 빠른 편이었던 아이는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더욱 다양한 어휘와 활동을 배워왔다. 집에 있는 것도 좋아하지만 어린이집에 가면 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들어가서 친구와 선생님들과 즐겁게 지냈다.
둘째 아이는 남아로 셋 중에 가장 늦게 걸었다(18개월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스스로 걸었다) 자기만의 호불호가 명확하고 좋아하는 장난감이 있으면 그것만 갖고 놀고 싶어 한다. 색에 대한 집착(초록색이라면 환장한다) 자동차나 비행기 등 탈 것에 대한 선호가 특징적이다. 셋째와 쌍둥이임에도 셋째보다는 정적인 편이고 길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이나 동물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등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다. 어린이집에 갔을 때도 좋아하는 장난감이 있는지 빠르게 살피고 먼저 선점하려고 뛰어들어간다.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엄마는 어서 집에 가라고 시늉하기도 한다. 헤어질 때도 항상 웃으며 헤어지고 다시 만나도 반가워한다.
셋째 아이도 남아로 대근육이 뛰어나고 활동적이다. 온몸이 근육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운동량을 자랑한다. 집안에 있는 것보다 나가서 뛰어놀기를 좋아한다. 셋 중에 가장 먼저 걸었고 가장 많이 걷는다. 어린이집에서 헤어질 때는 늘 운다. 엄마에 대한 집착이 가장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집 선생님들에게도 곧잘 애교를 부리며 잘 놀고 어디에 가서든 밥을 잘 먹는 대식가다.(가끔은 나보다 많이 먹는다)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인다. 언어는 가장 느리지만 눈치가 빠르고 얼굴 표정과 바디랭귀지가 뛰어나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데 문제가 없다.
이렇듯 세 아이는 모두 내 뱃속에서 나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각자의 개성이 다르다.
돌 지나고 나서 관찰한 이런 개인적인 특성들을 보고 어린이집에 가더라도 적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이의 성향을 토대로 어린이집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같은 유전자 풀에서 태어난 나의 세 아이가 서로 다른 기질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린이집 선생님과 맺는 관계의 양상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여기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 혹은 외면하는 사실이 있는데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해서 주양육자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보조 양육자가 더 생긴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아이가 맺는 관계가 확장됨을 의미한다.
다양한 어른과 안정된 관계를 맺는 것은 아이에게도 좋다.
잠시 엄마와 떨어져 있는다고 해서 아이의 불안도가 커지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시간에 엄마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다.
어린이집을 다니면 비상사태에 대한 여유가 있다.
하나의 마을이 아이 하나를 공동으로 키우던 시대에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더라도 여러 어른이 지켜보고 공동으로 키웠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엄마가 일대일로만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엄마가 아프다거나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어른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집을 다닌다는 것은 공동으로 아이를 키우는 어른의 역할을 나눠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상사태에 대한 대안이 없는 가정은 취약하다. 취약한 환경에 있는 엄마는 모든 것을 혼자 해내려다가 번아웃에 빠지기 쉽다.
우리나라는 이상하게도 일하지 않는 엄마가 어린이집을 보내는 것에 대해 유난히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것이 아이와 육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육아가 좀 더 수월한 나라는 어떤지 궁금했다. 전 세계적인 저출산 걱정 속에서 유일하게 아이를 많이 낳는 유럽 국가가 프랑스라고 했다. 프랑스의 경우 엄마가 느끼는 육아부담이 우리와 다른데 그 이유는 이러한 관점이 달라서임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169. 아무리 좋은 엄마도 아이를 돌보는 것에서 얼마간 자유로워야 하고, 그런 이유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전업주부 역시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유아를 크레쉬에 맡기는 일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177. 프랑스 여성들은 아이에게 올인한다면 엄마 자신의 삶의 질은 누가 책임지느냐고 공개적으로 의문을 던진다.
186. 엄마가 24시간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그다지 건강하지 않다. 아이는 엄마의 개입 없이도 스스로 내면의 삶을 일구어가야 한다.
"엄마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아이 하나라면 아이로서도 숨이 막힐 거예요. 정신분석학자들은 그 귀결을 잘 알죠"
양육을 포함해 삶의 어떤 영역도 다른 영역을 압도해서는 안된다.
_ <프랑스 아이처럼>(파멜라 드러커맨)
엄마가 24시간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그다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아이를 위해서는 엄마가 끼고 키우는 게 최선'이라고 이러한 사실을 무시한다.
대체 무엇이 최선이란 말인가? 건강하지 않은 상태의 엄마와 24시간 함께 있는 것이 건강한 엄마와 18시간 있는 것보다 좋은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아이와 함께 있는 순간에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아이 없이 홀로 있는 시간도 필요한 어른이다.
그렇기에 어린이집이 소중하다.
엄마의 희생으로 굴러가는
아니, 누군가의 희생으로만 굴러가는 가정은 건강하지 않다.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이 한 몸을 갈아 넣어야만 굴러가는 체제는 지속 가능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해도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의 취약점과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런 대안도 없이 어린이집 학대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 아냐며 겁을 주는 사람들을 보면 피곤하다. 엄마만큼 아이에게 잘해주겠냐고 묻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 엄마를 무슨 성인군자부처로 보는건가 싶다.
그들이 외면하는 진실은 이러하다.
세상에는 좋은 선생님이 훨씬 많다. 좋은 어린이집이 훨씬 많다.
피곤에 찌들어있는 엄마보다 잠시라도 리프레쉬된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아이에게도 좋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하느라 눈에 보이는 사실을 외면하느니 현실적으로 최선인 방법을 찾아 판단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어린이집의 문제점이라고 거론되는 점들이 있다면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집을 보내지 말고 엄마가 끼고 키워라'라고 결론을 내리지 말고 문제점을 해결하는 현실적인 방안이나 거시적인 정책의 변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말도 못 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 이만큼 외부의 오지랖에 무방비가 된다.
나는 이러한 무방비상태로 받은 공격을 통해 진실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이 글은 세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느끼는 나의 경험이자 사람들이 말하는 말이 진짜인지 탐구해본 경험을 녹인 글이다. 아이를 키우는 누군가에게 어린이집이 미지의 곳이라면 조금은 열린 마음으로 두드려보라고 하고 싶다.
아무말이나 나를 공격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
스스로 답을 구하고 나의 답을 횃불삼아 무소의 뿔처럼 가겠다.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