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둘이나 한꺼번에 생긴 첫째는 불쌍할까?

결핍은 무조건 채워줘야 할까

by 대강철저

아이가 하나에서 셋이 되는 순간은 기쁨과 막막함이 함께였다.

우리는 단란한 3인 가족에서 갑자기 북적북적한 5인 가족이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 큰 부자가 아닌 우리가 아이를 셋이나 키울 수 있을까 염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제한된 가계 상황에서 아이가 둘이 더 생겼다는 것은 첫째에게 갈 몫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첫째가 외동으로 오롯이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이 채 2년이 안된다.

16개월 즈음에 동생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고 첫째가 두 돌이 되고 2주 후 쌍둥이 동생들이 태어났다.

갑자기 첫째는 동생이 한꺼번에 둘이 되었다.

그렇다면 첫째는 사랑을 빼앗기는 걸까?


쌍둥이 임신기간 동안 나는 호르몬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첫째에게 미안해서 자주 울었었다.

임신기간의 잦은 입원으로 첫째를 양가에 맡긴 적도 많았고 몸이 무거운 엄마라 아이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응해주지 못한 적도 많았다.


엄마의 애정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아이가 사랑이 부족해서 슬퍼하면 어떡하지?

태교보다 첫째에 대한 걱정에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아이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다.

아이가 셋이 된 순간 나는 아이의 요구에 기다리라고 말하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그런데 내가 바로바로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요구에 응해주지 않자 첫째는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무작정 엄마만 바라보고 해 주길 기대하지 않고 어떻게든 스스로 방법을 찾았다. 고작 두 돌이 안된 아기도 이게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입덧이 심해 누워만 있던 시기에 첫째에게 포도를 씻어주고 속이 울렁거려 옆으로 쓰러져 누워있으니 첫째가 혼자서 살포시 포도껍질을 만지더니 하나씩 까기 시작했다. 18개월 즈음이었다. 나는 늘 껍질을 까서 입에 넣어주었었는데 내가 껍질을 안 까주자 스스로 해본 거였다. 생각보다 잘했다. 집중하느라 입도 오므리고 한 겹씩 한 겹씩 까서 입에 쏙 넣던 첫째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특하기도 했고 왜 아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아이가 동생이 생겨 슬퍼할 거라는 생각이나 애정을 빼앗겼을 거라고 미리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첫째는 자기만의 자율성이 생긴 것을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엄마 아빠의 관심이 자기에게 쏠리던 때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야금야금 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작은 아기는 개척자였다.


엄마 아빠가 먹는 젓가락에 관심을 갖길래 어린이용 젓가락을 사주고 쌍둥이를 낳으러 갔는데 조리원에서 나와 집으로 와보니 첫째가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젓가락을 사주지도 가르쳐줄 생각도 안 했었는데 내가 몸이 힘들어 떠먹여 주지 못하자 첫째는 젓가락 구멍에 손가락을 끼우고 열심히 움직였던 거였다.


첫째에게 동생이 생기는 것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장점이 이거였다.

그전까지는 엄마 아빠가 첫째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서 아이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주느라 아이가 스스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은연중에 차단하고 있었던 거였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도 하나씩 해내는 아이를 보며 감탄했다.


그러고 나서 아이의 변화를 관찰했다.

동생이 둘이나 갑자기 생긴 첫째는 불쌍할까? 갑자기 누나 노릇을 하느라 힘들까?


이것은 어른의 관점이다.

예전의 산업사회였다면 그랬을 거다. 동생을 먹이고 키우는 일에 일조해야 하는 게 장녀의 일이니까. 나는 자꾸만 옛 사고로 미리 걱정을 했던 거였다.


첫째는 애정을 빼앗긴 게 아니었다. 애정을 공유할 대상이 생긴 거였다.

첫째는 누나 노릇을 할 필요가 없었다. 쌍둥이 동생들이 말귀를 알아듣자 첫째는 우리 집 대장이 되었다.

동생들에게 지시하고 달래 가며 자기를 따르게 했다.


노느라 밥을 잘 안 먹던 첫째는 동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자기도 슬며시 자리에 앉거나 달려와 입을 크게 벌린다. 가끔 아기새들처럼 세 아이가 입을 쫙쫙 벌리고 그 입에 주먹밥을 뭉쳐 넣어주다 보면 엄마 새가 왜 그리 열심히 날갯짓을 하며 먹이를 물어오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맛있게 먹는 형제자매가 있는 것의 장점은 이거였다. 아이들은 함께 먹으면 먹는 것도 놀이가 된다. 잘 안 먹는 아가들도 어린이집에 가면 잘 먹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다 같이 먹는 분위기가 되면 입맛이 없어도 일단 수저를 들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결핍을 걱정했었다. 아이에게 갈 애정의 크기가 줄어들까 봐 염려했던 거였다. 그런데 애초에 애정은 한정된 크기가 아니었다. 첫째에 대한 사랑의 크기가 하나의 바구니라면 그게 둘째와 셋째에게 나눠지는 게 아니라 둘째는 둘째만의 사랑의 바구니를 셋째는 셋째만의 사랑의 바구니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을 몰랐다. 아이가 많아진다고 쪼개지는 게 아니라 전체가 커지는 거였다.


결핍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엄마가 채워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핍이란 여백과도 같아서 몸을 움직여 볼 자유가 주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결핍을 없애는 게 중요한가?

적당한 결핍은 비타민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뒤로 한걸음 물러서자 아이의 발걸음이 바빠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좀 더 물러서기로 했다.


아이에게 자율성을 준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해줄 수 있음에도 해주지 않는 것을 의미한 거였는데 나는 아이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바로바로 해줘 왔던 일들이었다. 안 먹으면 떠먹여 주었고 과일 껍질은 떼서 속알맹이만 쏙 넣어주고 옷에 묻은 흙은 먼저 털어주며 포시랍게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다. 포시랍게 키우는 것도 즐거움이긴 했다. 아이를 언제나 아기로서만 바라봐서 더 그랬나 보다. 나는 의식적으로 물러서기가 안 되는 의욕 충만한 외동 엄마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레 다둥이 엄마가 되면서 저절로 뒤로 물러서면서 생기는 결핍들을 강제로 바라만 보며 나의 조급한 생각들이 바뀌어 갔다.


결핍이 없는 것도 커다란 결핍입니다. 결핍이 없으면 필사적인 목표의식도 없어요. 죽기 살기로 덤비지 않죠. 결핍은 동기부여의 어머니이자, 격렬한 창작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_<엄마의 20년>(오소희) p76


나의 인생을 바꾼 책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려나. 오소희의 <엄마의 20년>은 엄마의 역할에 대한 나의 관점을 바꾼 책이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이 문구를 보며 나는 내가 지금 아이에게 주고 있는 것이 꼭 필요한 결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핍은 과연 동기부여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엄마들은 말하고 있어요. "나는 굶을 테니 너 혼자 떡을 다 먹어라. 모두 다 널 위해서다" 문제는 떡이 다섯 개란 것이지요. 아이가 하나만 먹고 배가 부르다 하면 엄마가 "큰일 났다. 어떤 집 애는 일곱 개도 먹는데..." 걱정하며 회사까지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아서 나머지 떡을 아이의 입에 꾸역꾸역 넣습니다. 아이는 그런 엄마를 빤히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 희생이 감사하다고 생각할까요, 쓸데없이 궁상을 떤다고 생각할까요? 어서 자라 떡을 벌어 와야겠다고 결심할까요, 하루빨리 이 지겨운 집구석을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할까요?

_<엄마의 20년>(오소희) p156


뜨끔했다. 나는 이런 엄마가 아니었나 되돌아봤다. 아이 앞에 숟가락을 들고 앉아 먹어라 먹어라 하는 엄마는 아니었나. 아무 생각 없이 사는대로 살다 보면 아이가 커서도 그러고 있지 않았을까.

'남의 집 애는 7개나 먹는다는데'라는 말에는 웃음이 났다. 내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토록 절묘하게 비유하다니. 남들이 한다는 이런저런 학습과 교육에 대해 우리 아이만 뒤쳐지는 건 아닌가 불안감을 느낄 때마다 '떡을 7개나 먹이는구나' 생각한다. 떡을 1인당 7개씩 욱여넣지 못하는 것에 슬퍼하지 않고 아이가 소화시킬 수 있는 정도의 떡만 주려고 한다. 적당량의 떡을 맛있게 나눠먹고 먹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려고 한다.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어야 되는 떡이 아니라 더 먹고 싶은데 딱 정량을 먹고 자제하는 조절의 능력도 키워주고 싶다. 건강한 식습관을 물려주고 싶듯 건강한 학습습관도 길러주고 싶다.


나는 이렇게 서서히 결핍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갔다.

억지로 결핍을 주는 것은 힘들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결핍의 장점에 집중해보려고 노력했다.

결핍은 모자란 게 아니다. 여백을 주는 것이다. 자율성을 펼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동생이 생긴 첫째의 변화를 보며 나는 우리 가정의 장점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미 다둥이 가정이 되어버린 마당에 단점에 아쉬워할 에너지가 없다.


세상의 모든 일들에는 양면이 있다.

모든 것이 채워지면 더 이상 채울 의욕이 사라진다. 결핍이 생기면 자율성도 생긴다.

나는 한쪽 면만 보고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아쉬우면 뒤집어 본다. 요리조리.


아이를 키우며 생기는 관점의 변화를 따라가 보는 과정이 즐겁다.아이가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행복하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완벽히 사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족을 이룬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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