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가 힘들 땐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그기

육아가 힘들 때 도망친 소설_시선으로부터, (정세랑)

by 대강철저

며칠째 세 아이가 돌아가면서 아프다. 첫째의 기침과 열을 시작으로 둘째와 셋째에게 감기가 차례로 옮겨갔다. 첫째와 둘째가 하루 만에 열이 내린 것과 달리 셋째는 사흘째 열을 달고 있다. 평소에 잘 먹던 아이가 열이 나니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숟가락 앞에서 꾹 다문 입을 바라보는 내 입술도 빠짝 빠짝 타들어 간다. 아이가 못 먹으니 나도 덩달아 식욕을 잃었다. 코알라처럼 하루 종일 매달려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마음과 동시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자괴감에 시달린다.


이렇게 아이가 아픈 날이면 내가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뿌리부터 흔들린다. 아이가 아픈 수백 가지 이유 중에서 엄마 탓이 아닌 게 없어 보인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의 원인을 찾는 것은 에너지 낭비일 뿐. 육아에서 대부분의 문제들은 시간이 약이니까 나는 아이가 감기에 나을 때까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아니, 버텨야 한다.


잠시 이 구덩이에서 나와 숨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나는 소설책을 폈다.

오늘 잡은 소설은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너무나 나의 마음을 읽어주는 듯한 구절을 만났다.

아픈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비명을 지르고 싶어 져서,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 끝없이 읽는 것은 난정이 찾은 자기 보호법이었다.

죽을 뻔했다 살아난 아이의 머리카락 아래부터 발가락 사이까지 매일 샅샅이 검사하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아이가 아닌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 한 게 없었다.

_시선으로부터,(정세랑) p23


내가 소설을 집어 든 이유가 이거였다.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그기 위해서.


아이가 아프면 쪼그라드는 마음을 벗어나기 위해서 소설을 펼친 거였다. 잠시 나와는 다른 세계 속에 머리를 푹 담갔다가 나오면 지금 나의 상황도 누군가가 보고 있는 어느 책의 한 페이지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의 현실을 마치 가상의 독자가 되어 바라보면 상황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원래 인생이 무슨 장르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니까.


소설을 읽는 이유는 현실도피이지만 다른 말로 새로운 현실을 경험해 보는 손쉬운 방법기도 하다.

육아가 지치고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올 때마다 손쉽게 도망가려고 나는 자주 소설을 집어 들었다.


너무 밝은 인물 말고, 나처럼 현실에 갇혀 괴로움에 버둥거리는 사람이 주인공인 책, 그렇지만 그러한 시대적 상황적 맥락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삶의 경로를 만들어낸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 나의 상황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주인공인 심시선 할머니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 삶의 여정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시대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내기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나 너무 힘들었어, 니들은 편한 거야."

라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을 하는 할머니란 얼마나 멋진가 말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내 안의 나선 경사로를 어떻게든 피해야겠다고. 구부러진 스프링을 어떻게든 펴야겠다고. 스스로의 비틀린 부분을 수정하는 것, 그것이 좋은 예술가가 되는 길인지는 몰라도 살아 있는 예술가가 되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매혹적으로 보이는 비틀림일수록 그 곁에 어린 환상들을 걷어내십시오. 직선으로 느리게 걷는 것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택해야 하는 어려운 길입니다.

_시선으로부터, p30


육아가 족쇄처럼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아이가 아프면 나는 뒷목에서부터 이마까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는다. 셋다 어린 영유아라 그런지, 아이 하나가 아프면 이는 곧 줄줄이 병치레를 한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이런 순간이 오면 묵직한 돌덩이가 가슴에 매달린 듯 숨쉬기가 버겁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자잘하게 아프지 않고 클 수는 없다는 것도 안다. 이제는 이런 순간들도 그저 지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매번 지옥이 되는 거였다.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수록, 괴롭다는 마음이 검은 잉크처럼 퍼져나갈수록, 아래로 아래로 자꾸만 기분이 파고들수록 억지로라도 내 안의 나선 경사로의 방향을 바꿔보려고 한다. 작지만 뭔가 생산적인 꾸물거림을 억지로 해본다. 소설을 읽으며 접어둔 페이지를 필사하고 글을 쓰며 몸을 움직여본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게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_시선으로부터,(정세랑) p288


이 부분을 읽고는 잠시 멈췄다. 아이 셋을 줄줄이 낳고 기약 없이 경력 단절 중인 나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자리가 있지만, 언제든 돌아갈 수 있기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과연 내가 나의 직업을 열렬히 돌아가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가? 라는 질문에 자신이 없기도 했다. 직업은 직업일 뿐 크게 의미 부여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돌아가서 서 있을 나의 자리를 생각하면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질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면 시도해볼 만하다니. 위안이 된다. 글을 쓰는 일도 함께 할 수 있으니까. 경험을 하고 경험을 내 것으로 녹여 글로 쓰는 것은 아마도 질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한 사람의 가상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잠시 나를 잊고 그 사람으로 살아볼 수 있다. 심시선 할머니의 삶과 그녀에게서 뻗어 나온 가지들인 여러 인물들의 삶이 겹쳐지면서 나의 뿌리에 대한 궁금증도 생긴다. 결국엔 나도 누군가의 딸의 딸의 딸일 테니까.


엄마를 따라 올라가며 만나는 여성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어느 시대에든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느꼈을 먹먹함과 막막함이 나의 피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엄마들이 있었기에 내가 있다. 오늘의 내가 있기에 삶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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