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전집 살 돈으로 내 책을 샀다

420개월을 위한 책육아(我)

by 대강철저

나의 한 달 용돈은 25만 원. 이 중에서 휴대폰비 약 4만 원, 커피값 약 3만 원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책을 사는데 쓴다. 옷도 화장품도 거의 안 사는 나는 오직 책은 사서 보는데, 아이들 셋의 책값보다 나의 책값이 더 들 때가 많다. 아이들 전집을 사려고 고민만 하다가 내 장바구니의 책을 먼저 결제하곤 한다.


첫째가 5살이 되자 도서관에서 스스로 책을 고를 줄 알게 되었고, 1인당 최대 대여 가능 권수인 5권을 빌려 내용을 다 외울 때까지 읽으면 반납한다. 쌍둥이 동생들은 누나가 갖고 있는 책들 중에 자신의 취향에 맞는 책을 골라 온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밥을 준비하는 동안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꺼내와 읽곤 한다. 집에 책이 많지 않으니 책을 고르는데 시간이 덜 든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본다. 쌍둥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형제에게 뺏길까 봐 부둥켜안고 자기도 한다.


첫째만 키울 때에는 아이의 개월 수에 맞는 책을 자주 검색해서 사줬다. 돌 전에 읽을 전집, 돌 지나고 읽을 전집, 두 돌 즈음에 잘 읽는 전집 등을 도토리 모으듯 모았다. 세상에 좋은 책이 어찌나 많은지, 많은 선택지들 중에 하나만 골라야 되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첫째가 4살쯤 되자 전집 중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취향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좋아하는 책은 여러 번 보지만, 자기 취향이 아닌 책은 거들떠도 안보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골고루 읽으라고 말하는 대신 서서히 전집을 사주는 횟수를 줄여갔다.


독서의 묘미는 편독이다. 책을 즐기려면 기본적으론 자기가 좋아하는 책만 주구장창 파는 편독이 책을 사랑하게 되는 지름길이다. 그렇게 한 분야에 파고들다 보면 서서히 관심사가 넓어지는 거다. 밥 먹으려고 앉았는데 자꾸 골고루 먹으라고 말하면 먹기 싫어지듯, 좋아하는 책 읽고 있는데 자꾸 다른 책도 읽으라고 하면 책이 읽기 싫어진다. 책은 필수영양제가 아니다. 책을 읽어주는 것에 너무 강박적일 필요는 없다. 육아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 하면 좋은 것이지 안 하면 큰일 나는 일은 아니다. 골고루 읽지 않아도 된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 취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요즘은 전집을 새로기보다 도서관에 자주 간다. 도서관에 가서 같이 책을 고르고 읽고 싶은 책들 중에서 '가장 읽고 싶은 5권'을 고르게 한다. 자신의 취향 중에 더 맘에 드는 것과 덜 맘에 드는 것을 구분하는 연습을 도서관에서 매번 하는 거다. 모든 것을 다 빌려올 수는 없다. 다른 것을 포기하고 고른 책은 더 소중한 법이다.


아직 쌍둥이들은 책을 빌려 읽을 나이가 아닌지라 집에 있는 누나의 책들을 위주로 읽는데, 갓 두 돌이 지난 아이들도 자기만의 책 취향이 있는 걸 보면 재미나다. 쌍둥이 형은 자동차, 기차 등의 탈것과 초록색이 들어간 그림책을 좋아한다면, 쌍둥이 동생은 고양이, 강아지, 토끼 등의 동물들과 빵, 과일 등의 먹는 게 들어간 그림책을 좋아한다.


책의 취향도 기질일까? 그런 듯하다. 어떤 기질이든 그 아이 나름의 선호도를 존중해주고 싶다. 책이라는 물건을 가까이하게 하고 싶다면 아이가 선택한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동차만 좋아한다고 자꾸 다른 책을 권유하면 읽던 자동차 책도 안 본다.


이제 아이들의 전집을 살 돈으로 내 책을 더 많이 산다. 나는 책을 줄 치고 포스트잇 붙이고 접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읽는 사람인지라 사서 읽는다. 책을 빌려 읽으면 깨끗하게 읽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책을 덮고 돌아서면 기억이 안 난다. 깨끗하게 읽으면 깨끗하게 잊힌다. 책은 자고로 쫙쫙 눌러가며, 쭉쭉 줄 그어가며, 인상 깊은 부분이 나오면 손톱으로 꾹꾹 페이지를 접어가며 읽어야 기억에 남는지라 새책이든 중고책이든 종이로 된 책을 사서 읽는다. 전자책도 잘 보지 않는데 이건 내가 책의 물성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종이를 만질 때 느껴지는 부드러운 질감과 책등을 한 손에 받치고 다른 손으로 후루룩 페이지를 넘기며 맘에 드는 부분을 펼치는 느낌이 좋다.


나보다 먼저, 혹은 동시대의 사람의 생각을 이토록 정갈하게 정리해 내 손에 쏙 들어오는 한 권의 책으로 정제해서 오다니! 새 책을 만나면 늘 경이롭다.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을 보는 비용과 비슷한데도 책은 내게 무언가 잡히는 또렷한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준다는 점에서 다르다. 수동적으로 내용을 받아들이는 영상과 달리,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여러 가지 관련된 생각이 떠오른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영화는 보이는 대로 받아들인다면, 책은 읽으면서 내가 영화를 만들듯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 어떤 영화도 책 보다 더 스케일이 클 수 없기에 책이 원작인 영화들은 독자들에게 실망이 큰 법이다. 누구도 뇌의 스케일을 넘어서는 영화를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을 선호한다.


아이들이 한두 살 때 개월 수에 맞춰 여러 권을 사주고 읽어주는 책육아(兒)엄마가 자기의 나이대에, 인생 과업별로, 변화에 맞춰 스스로를 책육아(我) 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효과가 좋을까?


나는 궁극적으로는 후자가 가족의 문화자본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세계가 넓어지면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세계도 넓어지니까. 이는 독서의 낙수효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전집 사줄 돈으로 내 책을 산다. 나의 문화자본이 곧 아이들의 문화자본이 될 것이므로.


나는 매일 책을, 종이책을 읽는데 동시에 적어도 두 권 많게는 네다섯 권까지 본다. 나에게 책은 티브이 채널과 같아서 무료할 때엔 채널을 돌리듯 책을 이리저리 뒤적여 본다. 쉬운 책은 손을 뻗으면 닫는 장소에 배치해두고 틈날 때마다 열어보고, 어려운 책은 독서모임에서 함께 분량을 쪼개 꼭꼭 씹어먹는다. 거실 식탁 옆에는 이케아 트레이가 있는데, 맨 아래칸에는 기저귀가 중간 칸에는 가제손수건과 물티슈가 있다. 그리고 맨 위칸에는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이 있다.


가장 손이 잘 닫는 곳에 책이 항상 있다.


식탁 옆 이케아 트레이 맨 윗칸은 내 책장이다. 아래 두 칸은 기저귀와 물티슈, 가제수건을 보관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핸드폰을 켜는 것처럼 책을 켠다. 얇은 에세이는 시간이 잠깐씩 뜰 때, 소설책은 화장대 위에 두고 머리를 말리면서 본다. <달러구트 꿈백화점> 같은 소설을 머리를 말리면서 보면 좋은 꿈을 꿀 것 같았고,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같은 소설은 머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우두커니 빠져들게 된다. <이기적 유전자> 같은 어려운 책은 혼자 읽기보다는 독서모임에서 같이 분량을 쪼개서 읽는다. 읽은 내용을 이해한 만큼 정리해서 독서모임에서 공유하고 생각을 나눈다. <총 균 쇠>, <이기적 유전자>, <코스모스>, <사피엔스> 등의 책들은 2~3번 읽고 생각을 나누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것이 된 책들인데, 이 책들을 읽고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평수가 확확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가슴 벅찬 경험을 많이 하고, 우주가 확장되듯 나의 생각의 경계가 확장되는 기분을 자주 느낄수록 아이들을 대하는 시각에도 조급함이 줄어들었다.


지금부터는 엄마 스스로를 위한 책육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만 35세, 즉 420개월을 위한 책육아(我)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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