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지를 닮은 나의 귀한 사람들.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 컨트롤.
쏟아져 나오는 감정을 작가는 감상자를 위해
잠시 품고 있어야 할 때가 있다.
가수가 노래를 부르다 감정에 취해 통곡을 해버린다면
감동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는 것처럼,
적당한 때 잠시 멈추고 다독여 주어야 알맞다.
작품을 하다 보면 감정에 도취되어
원치 않은 만큼 심하게 글자가 번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글씨를 지키기 위해서는
종이를 누르는 또 다른 종이, 압지壓紙가 필요하다.
무작정 번져버리는 글자를
압지로 꾹 눌러 작은 여백을 지키는 것이다.
전체의 비율로 따져보면 정말 조그마한 틈새에 그치지만
그것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눈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게 된다.
만약 이 눈이 감아지면
남은 곳이 온통 여백뿐이라 할지라도
다른 종이를 꺼낼 수밖에 없지만,
압지 덕분에 눈이 떠져 빛이 나오게 된다면
작품으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터져 나오는 나의 먹빛 눈물을
온몸으로 흡수시켜주는 이 고마운 압지는
사실 나에게 버려진 종이이다.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먹의 자국들 때문에 버려지기도 하고,
혹은 달필이 되고자 하는
나의 연습장이 기꺼이 되었다가 버려지기도 하는 습작들.
차디찬 바닥에 던져지기 전에,
그들은 나의 곁에 오래도록 남아
나와 함께 작품을 끝까지 완성시킨다.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꽃 사이에 놓인 한 병의 술, 마주하는 사람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네.
달빛 아래에서 술을 혼자 마시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은 잔 속에 비친 달과 자신의 그림자까지.
셋이 함께였음을 알았다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월하 독작>.
나 역시 홀로 작업을 한다 생각했으나,
압지의 성품을 닮은 주변의 많은 도움으로
무사히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들도 대충 넘어가다가
결국 실수로 이어진 적이 있다.
분명 되돌릴 수 있는 실수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삶이 망가졌다며 구겨버린
나의 어린 날들이 아득히 가득하다.
그때마다 나는 반성 대신에
차라리 잘 되었다며 새 하얀 종이를 펴내고
또 무작정 써 내려가려고 달려들었다.
그럴 때 나의 모든 아픔을
자신의 몸에 새겨둔 압지 같은 부모님과,
지난 과오도 예쁜 흔적으로 마음속에 새겨준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흐르는 눈물도 닦아주고,
번지는 눈물에 가려진 틈새의 빛을 지켜
나의 삶을 예술로 갈 수 있도록
함께 걸어주는 수많은 사람들.
꾹 꾹 눌러 작품의 눈을 밝게 지켜준 그들은
바라는 것 없이 다 내어주는 저 하늘과 닮아있다.
그들을 생각하면
같잖은 예술가의 오만과 아집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