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미 알고 있잖아.

소년 명필은 없다.

by 인중 이정화




“나는 여기서 자는 게 좋겠다.
오랜만에 왔으니까
…….
사실 배는 다 알고 있거든.”




선상에서 지난 추억을 되새기며 밤새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추운 내부가 걱정이었다.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되어 함께 한 사람들과 숙소를 잡아 옮기려고 하는데 선장님이 본인은 배에서 주무신다고 하셨다.


‘배는 다 알고 있다.’


그 말이 나의 가슴을 콕 찔러 듣는 순간

눈물이 툭 떨어졌다.


기업에서 강연을 하고, 인터뷰를 하며

서예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는 명목 하에

부끄럽지만 붓은 잠시 내려놓고

머릿속으로 글을 쓰고 입으로 완성시켰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붓을 잡으면

생각만큼 써지지 않는 것을 도리어 붓에게 탓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전시장에서 작품을 본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은 해도 빨간 스티커 하나를 찾지 않는 모습에 그들의 안목을 탓했다.




하지만 이미 나는 다 알고 있었다.


붓과 종이를 쓰다듬은 만큼,

먹과 벼루가 소리를 내는 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 정직하게 표현되었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 탓을 했을까.


잘 되면 남의 덕, 안 되면 나의 탓이라는

큰아버지의 말씀을 어째서 거꾸로 실행했을까.


노력 없이 결과를 얻으려 했었고,

배신하지 않는 땀 대신

세치 혀를 움직여 침을 더 흘리고 다녔다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붓에게 먹빛 목욕을 시켜주었다.

한동안 미안했다고, 나와 오래도록 함께 해 달라고

나의 마음에서 그의 마음으로 속삭였다.






서예인 인중 이정화

새 글은 화요일과 금요일에 올라옵니다.

instagram.com/injoongmaobi

injoongmaobi@naver.com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 너를 위한 나의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