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 오늘, 아빠와 데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목발을 짚고 천천히 걸어오신 한 분이 있었습니다. 하얀 머리의 노신사가 ‘인조이풀’ 창작 놀이터 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제 마음은 약간 복잡했습니다. 창작놀이터에서 진행할 시니어팝 프로그램에 모신 그분을 기다리며, 이 시간이 의미 있기를 바라면서도 조금은 걱정도 되었거든요.
평생을 축구와 함께 살아오신 분입니다. ‘발’로 뛰어다니며 살아온 삶. 그런데 최근 축구를 하시다 다치셔서 십자인대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이셨습니다. 그런 분에게 ‘발’이 아닌 ‘손’으로 하는 활동을 제안한다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싶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분은 늘 그랬듯이 “그래”라고 하시며 즐겁게 와 주셨습니다. 바로 저의 아버지였거든요.
아빠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십니다. 어제의 기억은 오늘 아침이면 사라지고, 오히려 오래전 축구 경기들은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계세요.
그런 아빠와 함께 사랑의 추억들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아빠가 다니는 병원의 담당 선생님께서 치매나 알츠하이머에는 손을 움직이는 활동이 도움이 된다고 말씀해 주셨기에, 제가 준비한 창작 활동이 조금이나마 생각하는 습관을 살려주는 도움이 되길 바랐어요.
그리고 잊혀져가는 시간 속에서도, 작은 추억 하나쯤은 남길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딸로서 아빠가 살아온 삶의 조각들을 듣고 싶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올라왔어요. 기억이 점점 흐려져도 존재의 무게는 남아있다는 것을, 함께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조이풀만의, 나만의 창작 활동을 통해 아빠가 아빠를 다시 만나는 시간을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나를 만나며 챗바퀴 속에서 죽어있던 삶이 살아났듯이, 아빠도 사시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내시길 바라면서요.
그날 아빠와 저는 조개껍질 위에 푸어링 아트를 함께 해보았습니다.
색깔을 고르고 물감을 짜는 일. 그 단순한 동작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엔 망설이셨지만, 손끝에서 용기를 짜내듯 아빠는 서서히 색을 흘려보내기 시작하셨어요.
흘러가는 물감, 섞이는 색, 예상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아빠는 스스로를 그려내고 계셨습니다.
90분의 시간이 흘렀고, 아빠는 완성된 작품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나 어릴 땐, 미술이 ‘미’였는데… 오늘은 ‘수’인 것 같네.
아무도 평가하지 않고, 누구도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 그 시간 속에서 아빠는 “나는 아직 할 수 있다”는 소중한 자각을 얻게 되셨습니다. 자신의 물감만 짜보는데도, 멋진 작품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작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나눠주는 모습은 작은 자존감이 피어난 순간이었고, 행복해 하셨어요. 저 역시 정말 행복했어요.
치매는 단순히 기억력 저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감, 관계, 감정의 연결이 함께 흐릿해지는 병이에요.
하지만 손을 사용하는 예술 활동은 뇌의 여러 영역을 동시에 자극하고, 신경가소성을 촉진하여 인지 기능 유지와 감정적 회복을 도울 수 있다고 해요. 특히 오감 체험형 미술 활동은 형태 감각, 색채 감각, 집중력을 높이며, 비약물적 치료 중에서도 정서 안정과 자존감 회복에 매우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이날의 경험이 단지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하루로 남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 많은 분들에게 위로와 영감을 전할 수 있는 '시니어 예술인 프로젝트'로 이 시간을 확장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딸로서, 그리고 간병하는 누군가에게 드리고 싶은 한 문장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을 잃어갈 때, 우리가 꼭 붙잡아야 할 건 기억이 아니라 ‘존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
예술은 존재를 존중하는 언어입니다. 말이 줄어들수록, 몸이 느려질수록, 예술은 말없이 마음을 꺼낼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줍니다.
To be continued…
#기억보다선명한사랑 #아빠와의시간 #알츠하이머예술치유#시니어팝 #창작으로기억하기 #감각을잇는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