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중

Ep.02 — 그날, 엄마는 소녀로 돌아갔습니다

by 행복가득한나

평생 남의 밥을 지어온 손

엄마의 손을 유심히 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요.

거칠고 투박해진 그 손은 평생 축구선수들의 밥을 지어왔고,

지금도 매일 밭일을 하며 흙을 만지고 계십니다.


아빠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성향이라 다른 일에는 서툽니다.

집 전등 하나 교체하는 일도 결국은 엄마의 손이 닿아야 했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 그 손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준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엄마의 손은 늘 누군가를 위한 손이었습니다.

지금도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반찬을 해 주거나, 차를 몰아 달려가며 그 손을 나누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날, 그 손이 오직 자신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빠가 하나 만들 동안, 엄마는 넷을 만드셨다

그날, 인조이풀 창작놀이터에서 엄마는 폭발했습니다.


아빠가 조심스럽게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90분 동안, 엄마는 예쁜 조개 두 개를 골라 놓고는

네 개의 작품을 뚝딱 완성해냈습니다.

머릿속에 그린 것을 곧바로 손으로 옮기는 힘이 그 순간 더욱 빛났습니다.

마치 평생 참아온 무언가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순간 같았습니다.


“나 학창시절에 미술 좋아했었어. 아빠가 잘 하면 공부시켜준다고 했었는데…”

작업 도중 불쑥 나온 엄마의 고백.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접어야 했던 꿈.

젊은 시절, 직접 옷을 디자인해 맞춰 입을 정도로 예술적 감각이 있었던 엄마.


그런 엄마가 평생 아빠의 축구 인생을 뒷받침하며 자신의 색깔을 지워왔던 겁니다.

일부러 지운 건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부모님들이 살아낸 세월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색을 돌볼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요.


"소녀가 된 기분이었어"

다음날 아침, 엄마에게서 카톡이 왔습니다.

"어제는 소녀가 된 기분이었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카톡이었어요.

그 짧은 문장에 저는 울컥했습니다. 알츠하이머로 대화가 점점 어려워지는 남편을 돌보며 지쳐가던 엄마가, 90분 동안만큼은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지셨던 거예요.


같은 공간. 다른 속도. 그래도 함께

엄마와 아빠의 작업 속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성격도, 표현 방식도, 살아온 삶의 결도 달랐죠.


평생의 반을 함께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나란히 앉아 계셨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기억이 흐려져도, 창작하는 그 순간만큼은

두 분 모두 온전히 ‘나’로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2년 만에 깨달은 것

인조이풀을 2년간 운영하면서,

정작 부모님께는 이런 시간을 드리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남들에게는 “창작을 통해 자신을 만나세요”라고 외치면서,

가장 가까운 부모님께는 그 기회를 드리지 못했던 거죠.


엄마의 “소녀가 된 기분”이라는 말은 제게 하나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아빠만 초대하려 했던 계획에서 벗어나, 엄마에게도 이런 시간이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앞으로 이런 순간들을 더 많이, 더 자주 만들어드리려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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