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감이 가득한 북유럽 망망대해에서의 하룻밤

그 빛은 나를 비추었다.

by 정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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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워있는 방이 움직이고 있다.

“붕~”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코펜하겐을 떠난다.

“바이바이!”


9년이라는 길고긴 시간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작한 여행. 왜 북유럽이었냐고?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범위에서 생각한다. 여행을 시작할 때 나의 생각은 딱 ‘대한민국 제조업 대기업 과장’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야근 많이 하는 한국 회사에서 근무했으니 반대로 행복지수가 높고 칼퇴하는 북유럽을 가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제조업 회사를 다녔으니 제조업으로 가장 유명한 독일이나 스웨덴을 가고 싶었다. 그 나라들은 깔끔하고 간결하면서도 화려함이 없었기에 정신건강에도 좋고 내 스타일과 잘 맞았다. 청정의 환경만큼이나 정치 청렴도도 높았다. 그 여행의 시작에 크루즈 선을 탑승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을 잊고자 또, 과장이 되고자 그냥 생각 없이 이제껏 열심히 일해 왔는데, 정신없이 6개월이 지나자 다시 아버지 생각이 났고 비슷한 시기에 과장이 되고 나니 허무함이 몰려왔다. 그래서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던 것 같다. 사람이 좀 없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여행의 시작 전에 회사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야! 너 나가니깐 회사가 2주만에 기다렸다는 듯이 1년 자기계발 휴가를 발표하더라~”


좋은 회사였으니 아쉬울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앞으로 펼쳐질 경험들이 더 값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리라. 다만 그들의 관심과 응원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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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저녁을 먹고 방으로 들어왔다. 저녁 석양을 보면서 방 스탠드를 켰는데, 아늑한 공간에 무엇인가 편안함이 나를 감싸는 느낌이었다. 북유럽 감성인건가? 아늑한 불빛은 내가 한번도 본적 없는 북유럽의 석양과 검은 바다와 어우러져 신비하게 느껴졌다. 마치 앞으로의 모든 여정을 편안하게 지켜주겠다는 그러한 소박하지만 따뜻한 믿음이 생겼다.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방에서 눈을 떠보니 두어 시간 정도가 지나있었다. 여행의 처음이어서 그런지 버려지는 시간들이 아까웠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사진에 담고 싶었고 체력도 열정도 충만했던 것 같다. 상쾌한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 외투를 입고 다시 옥상으로 향했다. 8월말의 늦여름이었지만 북유럽의 밤공기는 싸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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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밤 북유럽의 바다였다. 망망대해. 아마 수백 년 전 바이킹은 이 바다를 마음껏 휘저으며 다녔을 것이다. 검은 하늘과 검은 바다에 별 빛도 없이 달이 홀로 떠있었다. 그 달은 하늘을 빛내기도 했지만 바다를 비추기도 했다. 그 빛이 잔잔한 바다 위에서 내가 타고 있는 이 배 앞까지 비추었다. 그리고 나를 비춘다. 마치 하늘에서 아버지가 스포트라이트를 쏘며 나를 축복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불빛은 홀로 떠있었지만 북유럽의 바다를 밝혀주기에 충분했다. 조금 싸늘하긴 했지만 그림 같은 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러한 고독함을 즐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혼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햇빛은 우리를 비춰준다는 느낌이 있지만 이 밤의 달빛은 왠지 오직 나만을 비춰준다는 특별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 특별한 느낌을 시원한 북유럽의 여름밤 망망대해에서 충분히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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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뜰 녘 다시 눈이 떠졌다.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시차적응이 아직 안된 것 같다. 가방을 조금 싸고 씻은 후 바로 배 꼭대기로 다시 올라갔다. 북유럽에서 해가 뜨는 모습, 그것도 바다 한가운데서 보는 그 광경을 놓치기가 싫었다. 모든 금은보화는 부지런한 자의 것. 사진 같은 풍경도, 여행 후 남는 추억도 모두 부지런한 자의 것이다. 새벽같이 올라가 바다 끝에서 조금씩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는 해를 보았다. 그리고 그 해는 아침 식사를 하는 지금에까지 나를 비추어주고 있었다. 북유럽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눈부신 바다위의 아침햇살이 나를 따뜻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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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오늘 새벽 그리고 지금 아침식사 시간에서도 달빛과 햇빛은 나를 비춘다. 빛이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것 같다. 지속적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건가? 그리고 축복해 주신다는 것인가?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인가? 마음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감동이 있었다. 주위사람들이 있어서 울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위안이 되는 빛이었다. 밥은 맛있었지만 많이 먹히지는 않았다. 지금 있는 자리를 그냥 지키고 싶었다. 하늘...바다... 그리고 나를 비추는 달빛과 햇빛. 이러한 경험에 참으로 감사했다.


노르웨이에 다다랐다. 밖으로 숲과 자연, 그 사이사이로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바라던 북유럽의 풍경이었다. 한적함과 조용함 속 조금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지겹지 않은... 그 해안가를 따라 빌딩만한 크루즈가 미끄러져 내려간다. 신기하게도 해안가를 따라 내려가지만 바다는 여전히 잔잔했다. 크루즈로부터 뻗어 나가는 약간의 진동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맑고 투명했다. 그 진동 속에서도 집들이 물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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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위에 있는 집들에서 쪼그만한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배가 지나가는 것을 볼 텐데... 사람들 참 소박해보이고 아래 깔려있는 물만큼이나 맑아보였다. 이렇게 맑은 물속에도 물고기가 살까? 작은 보트에서 손을 흔들며 뭐라고 인사한다.


“정과장! 보고서는 책상위에 올려놨나?”


갑자기 우습고 엉뚱한 상상이 떠올랐다. ‘저 사람이 우리 부장님이었다면...’ 이러한 상상마저도 회사 업무에 관한 것이라니... 앞으로 벗어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놈의 책임감. 업무에 대한 생각, 회사에 대한 농담은 언제쯤 내 머릿속에서 사라질까? 어젯밤 술병 속에 담에 모두 바다 속에 던져버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이제 슬슬 배가 육지에 닿았고 나는 노르웨이에 도착했다. 숲과 자연, 요정 트롤이 사는 나라 노르웨이. 그동안 메가시티인 서울에서 자라 치열했던 회사생활로 몸에 쌓인 때를 이곳에서는 조금 뺄 수 있겠지. 그리고 자연과 더 가까워질 수 있겠지. 내가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찾고 싶어 한 행복이란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수 있겠지.


퇴직금 잘 쓰면서 다녔던 여행의 시작. 이후에 여러 곳을 다녀보았지만 무엇이든 처음은 더 신기하고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리고 아늑했던 방안에서 바라본 저녁 석양, 차가워만 보이는 검은 바다와 모든 것을 비추는 달빛, 축복처럼 나를 따라온 아침 햇살, 잔잔한 바다, 청정의 숲과 집들 그 모든 것이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