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곳에 6일씩이나 머무르도록 일정을 정한 이유는 지난 몇 개월간 북유럽, 독일, 영국 등의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조금 한적한 곳에서 여유를 가지고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그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무르고만 싶은 것이 있었다. 그렇게 이곳에 도착했다. 오후 3시 반이나 되었을까 캄캄한 밤을 뚫고 방을 찾아왔다.
아늑하고 깔끔했던 내방. 이곳에서 며칠을 보내야 한다. 방안에 전기주전자가 있어서 여행하며 만난 한국 사람들에게 얻은 컵라면을 데웠다. 홀로 시간을 보내고자 북극권 넘어 외딴 곳에 왔기에 이러한 쓸쓸함을 즐기려고 했던 것 같다. 라면이 적절하게 익었을 때 창문을 열어 바깥 공기를 맡았다.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북극권 넘어 눈 덮인 세상. 눈이란 것에 냄새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냄새일까? 시원한 공기와 따끈한 라면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저 이틀정도 스쳤을 뿐인데 고맙네.’
라면을 다 먹은 후 내가 묵고 있는 리조트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로비의 직원은 퇴근한 상태였고 복도에도 사람은 없었다. 식당은 비수기로 저녁시간 이후에 문이 잠긴 상태였고 중간중간 보이는 아늑한 쉼터에도 사람은 없었다. 리조트 구석구석을 다녀보았지만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처럼 아무도 마주치지 못했다. 쉼터에 잠시 앉았다. 물론,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이곳을 찾았지만 독점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렇게 아늑한 곳에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 특기이다. 한 30분을 늘어졌을까. 리조트 밖으로 나가보았다. 오로라는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은 약간 파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아까 체크인할 때 로비 근무원이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가끔 사진을 찍으면 찍히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사진기를 들고 하늘을 향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에선 놀라운 효과가 일어났다. 그저 검푸르기만 했던 하늘이 초록빛 하늘로 바뀌었다.
‘아, 오로라는 무조건 사진이 과장이구나.’
그럼에도 언제 오로라가 나타날까.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한 시간이 지났을까 날씨가 조금 많이 추워져 방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조식을 먹은 후 정오가 되기 조금 전 리조트를 나왔다. 오후 3시가 되면 캄캄해지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3시간뿐이었다. 리조트 앞에 내리막길이 있어 그 길을 따라 내려갔다. 한참을 걸어 내려가니 호숫가와 마주쳤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차가워 보였다. 하늘은 검회색이고 땅은 눈으로 덮여있었으며 산, 나무 그리고 모든 것들이 생명을 잃은 것처럼 메말라있었다. 검은 하늘, 검은 나무, 검은 호숫가는 북극권 넘어 이 땅이 마치 죽음의 땅인 것처럼 냉정하게 느껴졌다. 이 죽음의 땅에 아무도 없이 나홀로 적막하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에는 누군가가 지나간 발자국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아비스코의 유명한 하이킹 코스인 왕의 길(Kungsleden)을 따라 걸었다. 약 30분 정도를 걸었을까. 얼어버린 개울가가 나오고 그 뒤로 눈 덮인 산과 흐린 하늘을 뚫고 약간의 빛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모습이 진풍경이었다. 북극권 넘어 개울과 바위, 산과 나무 모든 것이 눈에 덮이고 하늘마저 눈 덮인 이곳. 나를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저 산 뒤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천국? 아버지? 내가 살아오면서 찾으려 했던 것들에 대한 정답들? 방금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땅을 운운했었는데, 이곳은 마치 눈 덮인 천국과도 같았다. 한동안 여유를 가지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했기에 만약 캄캄한 밤이 없는 여름이었다면 그 정답을 찾아 계속 전진했을 텐데 이제 어두움이 찾아오는 오후가 되었기에 이러한 물음들을 뒤로하고 다시 리조트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도 제법 쓸쓸한 밤을 보내겠지만 어느덧 한적한 이 기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다음날 나는 이제까지 묵은 아비스코 마운틴 스테이션(Abisko Mountain Station)에서 모든 짐을 정리하여 약 1.5km가 떨어진 아비스코 게스트 하우스(Abisko Guest House)로 숙소를 옮겼다. 참고로 마운틴 스테이션은 아비스코 투어리스트 스테이션 역(Abisko Turiststation)에 있고 게스트 하우스는 아비스코 외스트라 스테이션 역(Abisko Östra station)에 있어 기차역 짧게 한정거장 정도를 걸었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자 인터넷 카페에서 연결된 네 명의 한국인 친구들과 만나게 되었다. 앞으로 이친구들과 3일을 보낼 것이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땔감을 썰러 나갔다. 이따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밖에 있어야 했고 따뜻한 불을 때기 위한 땔감이 필수였다. 나뭇가지들을 자르고 땔감을 확보하여 나무 뒤로 숨겼다. 이제 날이 어두워져 저녁을 해 먹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밤 9시 정도가 되었을 때, 다른 숙소를 쓰고 있던 T가 달려왔다. 오로라가 나타났다고...
창밖을 보니 과연 길고 긴 오로라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즉시 밖으로 나가 호숫가에서 낮에 준비한 땔감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하늘에 걸려있는 오로라를 보았다. 하늘 한쪽 편에서 다른 한쪽 편으로 길게 늘어선 오로라는 말 그대로 생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양이 하늘에서 피고 있는 꽃처럼 봉오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모두들 넋이 나간 듯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 꽃봉오리가 전부 다 피고 하늘로 올라가 살아질 무렵 다른 한쪽 편 산 뒤에서 오로라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호숫가 위를 거쳐 병풍처럼 우리 앞에 펼쳐졌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가 하늘 위에 두루마리를 펼친 것처럼 너무 생생해 보였다. 그저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에 너무 감사함을 느꼈다.
다음날 우리는 숙소 주변 호수로 나왔다. 이곳이 북극권 넘어서이고 지금이 겨울이어서 그런지 완전히 화창한 하늘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모든 것이 죽은 듯이 조용하고 잠잠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1.5km를 떨어진 내가 처음 묵었던 아비스코 마운틴 스테이션 왕의 길로 향하였다. 그곳을 향하며 동행인 H가 K에게 자신의 사진을 부탁했다. 자연스런 사진을 찍어달라고. 나도 함께 찍었다. 눈 덮인 북극권의 길에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사진을 부탁했다. 그리고 사진은
우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웃었다. 나는 대기업 과장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시작한 여행이었고 H는 또 다른 대기업 선임연구원이었는데, 두 사람의 자연스럽다는 포즈는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아재 사진이었다. 우리는 나름 자연스럽게 찍는다고 포즈를 취했던...
그렇게 걸어가던 중 마주하게 된 왕의 길. 이틀 전 왔던 길이었기에 마치 가이드인 것처럼 친구들을 안내했다. 시간은 어느덧 한 시 반을 넘어서고 한쪽 하늘에서는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오늘도 이곳은 고요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다섯이었다. 적막하지만 운치 있는 그 길을 함께 걸었다. 만약 혼자였더라면 조금 어둑해지는 날씨에 머뭇거렸을 텐데 서로를 의지하여 걸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사진밖에는 없다며 이리저리 다니며 신나게 사진 찍었다. 우리 다섯 중 두 사람은 아직 학생이었는데, 아무래도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이니 더욱 재미나고 활기찼던 것 같다. 이틀 전 홀로 다니며 어둠의 땅 같았던 아비스코가 이제 다시 웃음 넘치는 우리들의 앞마당으로 바뀌고 있었다. 물론 그 적막했던 시간도 나에겐 귀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홀로 어딘가 있고 싶었던 그 기분들이 모두 충족된 후에 사람들과 만나서 함께 그 풍경을 즐겼던 것 같다. 이렇듯 한순간에 달라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보다. 그동안은 내일만으로도 바빴기에 좀처럼 사람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소중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비스코 국립공원 이곳저곳을 뛰어 돌아다니자 이내 곧 어두움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안전을 위하여 다시 숙소로 이동을 하였다.
그날 저녁 다시금 새로이 오로라가 피기 시작했다. T는 다시 우리가 있는 숙소로 달려왔지만 우리는 더 이상 오로라에 관심이 없었다. 아마 어제 본 오로라가 세계 최고의 장면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추운 북극권의 밤공기를 더이상 마시기 싫었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서로가 언제 알았냐는 듯이 각자의 스케줄을 따라 한사람씩 게스트 하우스를 떠났다. 세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스톡홀름, 하노버, 로잔으로, 두 사람은 조금 더 시간을 보낸 후 기차를 타고 스톡홀름으로 가게 되었다. 사실 아비스코는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많이 가지 않는 편이다. 그 북극권 자연의 땅, 국립공원 아비스코에서 함께 오로라를 본 인연. 이제 우리 각자의 길에는 어떠한 앞날이 펼쳐져 있을까? 내 개인적으로는 홀로 오랜기간 여행을 하다가 새로 알게 되어 함께였기에 더욱 신비했던 북극권 넘어 오로라의 그 밤이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