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함에 담긴 존귀한 보석-황금의 방

by 정인기
DSC03616.JPG 스톡홀름 시청사

군대 100일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아버지께서는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남자는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세 번 정도 겪는데 그게 대학갈 때, 군대 갈 때, 그리고 회사 다니면서 너희들 부양해야할 때였다. 그중 가장 쉬웠던 것이 군대였는데 그걸 그렇게 힘들어하냐?” 내가 군대에 간 시기가 99년 상반기였기에 구타의 마지막 라인을 타고 있을 때였지만 그래도 60년대 초에 가신 아버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에도 아버지는 나에게 가감 없이 말씀하셨다.


“모난 돌이 정맞기 마련이야.”


“너는 뭔가 특별한 삶을 바라는 데 삶이란게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야.”


또, 회사를 다니며 휴가를 내어 미국 뉴저지 이모 집에 갈 때면 항상 말씀하셨다.


“이모 집 가면 꼭 물 아껴 써라.”


아버지는 항상 예의와 정도를 걷는 삶을 강조해오셨고 본인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아오셨다. 할아버지는 평생 글을 쓰시면서 살아오셨다. 할아버지의 가장 유명한 소설은 사회를 풍자하는 대중문학으로 영화로도 개봉되었으며 단편소설과 기행문은 교과서에 실렸다. 80년대 출간하신 장편소설은 동명의 TV 드라마로 나올 정도로 유명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장남이었다. 본인이 요청하시면 어쩌면 조금 돌아가는 길로 가실 수도 있으셨던 분이셨지만 아버지는 결코 편한 길을 찾지 않으셨다. 기자의 사명감으로 신문사에 입사하셔서 경찰서를 출입하는 사회부 기자라는 가장 힘들고 고단한 길을 거치셨다. 정권에 의한 몇 번의 언론 탄압에 수차례 퇴직원을 내었지만 이내 복직되었다.


한편 우리는 90년대 말까지 친척에게서 중고차를 받아 사용하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께서는 그동안 모으신 돈으로 새 차를 사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그때 금융위기가 찾아와 아버지는 주위 눈치를 보시며 본인이 생각하셨던 모델을 사지 못하셨다. 우리는 아버지의 직위가 언론사 고위임원이셨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던 차가 외제 차도, 대형차도 아닌 국산 중형차였기에 그 정도는 사회에서도 용인해 주니 주위의 눈치 보지 마시고 그냥 사시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두 단계 낮은 모델을 사셨다. 항상 주위를 살피시고 모든 것을 제대로 누리시지 못했던 아버지셨다.


그 아버지를 지구 반대편 북유럽에 있는 황금의 방에서 느끼고 있다.

DSC01099.JPG 황금의 방

북유럽 왕가의 모토는 ‘검소하지만 위엄을 잃지 않는’이라고 한다. 실제로 왕가도 그들의 권력을 시민에게 이양하였고 북유럽 사시는 교민들에게 물어보면 국무총리도 자신이 국무총리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총리인지 모를 정도로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한다. 우연히 초대된 스웨덴 대사관저 만찬에서도 대사님은 주변 일손이 있음에도 의자, 책상도 모두 직접 나르시고 테이블보도 직접 까셨다.


여행을 시작하며 화려한 것보다는 소박한 것, 단정한 것을 보기 위해 이탈리아, 스페인은 제외하고 북유럽과 독일 위주의 일정만을 계획하여 스웨덴에 도착하였다. 반듯하고 소박해 보이는 도시인 스톡홀름. 그 시청사 내부. 지금 나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방이라고 하는 황금의 방에 있다. 권력이 있었지만 그것을 누리는 길을 택하지 않고 검소한 길을 택한 북유럽 왕가. 나의 스웨덴 친구는 자신의 국왕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직접 만났을 때 너무 친절하고 소박했다고. 그들이 포기한 권력의 상징 중 하나인 황금의 방. 노벨상 만찬이 열린다는 황금의 방. 이곳에서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를 마주하고 있다. 고귀한 삶은 화려한 것도, 쉽게 얻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그분의 말씀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작한 여행. 지구 반대편으로 나는 도망치듯 날아왔지만 그곳에서도 나는 아버지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분은 아직까지 나에게 가르침을 주신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나에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지 지금 내 마음속에 찾아와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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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당당하게 사회에 맞서셨던 것처럼 나 또한 쉬운 길만을 찾아가지 않길 다짐해 본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품격이란 것은 부요함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유산은 검소하지만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고귀함 속에서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마치 너무 평범해 보이는 스톡홀름 시청사에 감추어진 가장 존귀한 보석인 황금의 방처럼 겸손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품격을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해 본다.


어머니는 항상 나의 특별함을 말씀하셨고 아버지는 내가 스스로에게 철저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두 분 모두 맞는 말씀이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특별함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겸손과 절제에서 체득되는 것이다. 내가 존귀하신 부모님의 자녀라는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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