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빛내는 작지만 강한 도시 헬싱키

by 정인기

사진 찍기 좋아하는 나에게 헬싱키는 완벽했다. 몇 분을 걸어도 사람들과 마주치기 힘들었으며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찍은 사진 속에도 사람은 없었다. 너무 한적하기에 마치 뉴스에서 폭풍 대피 안내를 했는데, 나와 몇몇 관광객들만 그 사실을 모른 체 헬싱키 거리를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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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짐을 풀고 나와 바닷가 쪽으로 향했다. 바닷가 역시 사람이 없어 여유롭게 걸었다. 그런데 구름이 범상치 않았다. 정말 폭풍이 오는 것인가? 하지만 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닌다. 이번엔 헬싱키 시내 중심가인 알렉산테린 거리와 그 옆에 있는 에스플라나다 공원을 향했다. 이곳 역시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차분히 사진도 찍고 느긋한 마음으로 도시를 한 바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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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게 헬싱키를 음미하듯 걸으며 본 모습은 다른 북유럽 국가들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위치상으로 러시아와 붙어있어서인지 북유럽 국가라고 하지만 도시의 외형적인 모습은 오히려 러시아에 가까웠다. 헬싱키의 두 얼굴. 곳곳에 노동을 강조하는 동상과 우리가 흔히 러시아라고 생각하면 떠오를 수 있는 블록으로 된 거리, 건물들이 전형적인 북유럽의 국가들과는 달랐다. 재미있는 것은 한나라의 수도는 그 나라에서 제일 번화할 것 같은데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혼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나 외딴곳을 가고 싶지만 그곳이 시골과 자연이 아닌 한 나라의 중심지인 곳을 원한다면 헬싱키가 적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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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방향을 바꾸어 중앙역으로 향하였다. 헬싱키 시내가 그리 크지 않기에 쉽게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를 반겨주는 것은 네 명의 거인이었다. 중앙역 정문 앞 네 명의 거인상. 그들은 두 손을 모아 묵묵히 중앙역을 밝혀주는 빛을 들고 있다. 그들의 수고 가득한 모습과 아까 거리 중심가에서 본 노동자들의 모습이 단순히 행복 가득한 북유럽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인 느낌을 주었다. 마치 그러한 행복에는 노동이라는 댓가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았다. 엘프, 신비함, 자연과 동화 속 세상을 보여주는 북유럽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기보단 낫과 망치를 상징으로 하는 냉혹한 러시아와 사회주의에 더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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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전차를 타고 현대 건축과 산업디자인에 영향을 준 알바르 알토의 집으로 향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집안을 구석구석 보았다. 그의 집은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채광이 잘되는 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는 그의 철학의 결집체였다. 햇빛이 잘 들어 따스하고 군더더기 없이 아늑해 보이는 거실과 그의 작업 공간을 돌아보며 방안을 보기 위해 손잡이를 잡고 방문을 열었다. 물론, 깔끔해 보이는 방 안의 모습이 놀랍기도 했지만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내가 잡은 문손잡이였다. 무언가 부드러운 느낌의 디자인이었지만 내가 잡은 손잡이에선 강하고 단단함이 느껴졌다. ‘화려하지 않지만 질리지 않는’을 모토로 하는 북유럽의 디자인 감성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느낀 것은 그들의 단단함이었다. 소박해 보이지만 단단해 보이기도 한 그것이 북유럽의 디자인을 세계 제일로 이끌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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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문, 화장실 문을 닫는데 아까 알바르 알토 집에서 느꼈던 단단함과 무엇인가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침대에 누워 카드키를 보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카드키였는데, 뒷면에 특이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 카드키로 문을 열거나 불을 켜거나 신발을 신을 때 사용하시오. 사용할 때 이 카드키는 플라스틱으로 코팅되어진 지속가능한 80%의 북유럽 나무를 원료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우리 호텔은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선택입니다.”


이제까지 북유럽을 돌아보며 순진무구해 보이는 사람들, 칼퇴와 행복이 보장된 모습, 망해버린 조선업, 아시아에 빼앗겨버린 IT 제품과 자동차 시장 등을 바라보며 북유럽 제품은 무엇이든 좀 어설프다는 관념이 있었는데, 오늘 거리에서 본 노동을 강조하는 동상, 중앙역 정문 앞 빛을 들고 있는 거상, 알바르 알토의 집, 단단히 닫히는 문, 그리고 카드키를 보면서 북유럽의 전문성과 강인함을 느꼈다. 선진국의 면모는 어디가지 않는구나.


그리고 옛날 철없었던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학시절 컴퓨터 게임에 중독되었던 모습, 회사에 다니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져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쉽게쉽게 해결하려고 했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본 TV 다큐가 기억났다. 양재동 꽃시장에서 꽃을 도매하여 지역시장에서 판매하는 젊은이의 이야기였는데, 기자가 활짝 핀 꽃을 보며 젊은 상인에게 물어보았다.


“이 꽃 보기 좋은데 이것을 통째로 사야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젊은 상인은 대답했다.


“아니요. 보기 좋은 것을 사는 게 아니라 팔기 좋은 것을 사야죠.”


그의 답변이 나오자 아버지는 ‘저 친구 생각이 제대로 박혔구만’이라고 하시면서 ‘저 모습이 바로 내가 닮아가야 할 모습’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몇 번이고 주말 용산에 나가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회사 일을 열심히 하고 야근도 많이 하였지만 알맹이와 목적이 빠진, 무언가 방향을 잃은 모습이었고 아버지께선 더 전문적인 목적과 확실한 미래를 설정하여야 함을 강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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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짐을 챙긴 후 배를 타고 수오멘리나 섬으로 향하였다. 핀란드가 한국과 비슷한 점은 역사학적으로 우랄 알타이 산맥에 그 민족의 근원이 있다는 점도 있지만 우리나라가 러시아, 중국,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침공을 받았던 것처럼 핀란드도 러시아와 스웨덴의 사이에서 전쟁을 많이 겪었던 점 또한 비슷했다. 이에 더 나아가 우리에겐 서울 근처 강화도라는 산성으로 된 섬이 있었다면 핀란드 헬싱키에는 수오멘리나 요새 섬이 있었다는 것이 더욱 세부적으로 비슷했다.


헬싱키를 수호했던 수오멘리나 섬의 대포와 탄약고, 참호와 옛 조선소의 흔적을 돌아본 후 바닷가로 향했다. 한적함 속에 잠시 걸터앉아 머나먼 바닷가를 바라보며 잠시 핀란드와 헬싱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헬싱키. 반면 노동을 강조하는 중심가의 동상, 빛을 얌전히 들고 있는 중앙역 거인들, 단순해 보이지만 질리지 않는 디자인과 소박함 속에 우러나오는 강인함과 단단함.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강인한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모습이 핀란드라는 나라를 세계 행복지수 1위로 만들어주었음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중앙역 네 명의 거인은 작은 빛을 들고 헬싱키 중심 모든 것을 포용한다. 얌전히 그들의 수고를 받아들이는 모습이지만 그 작은 빛은 북유럽을 빛낸다. 아니, 북반구를 넘어 세계를 빛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생각하며 나는 또한 다짐해본다. 거창한 것보다는, 작지만 인류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핀란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 작지만 강한 빛을 들고 있는 중앙문의 거인처럼 미약하지만 내가 가진 것으로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살아야 한다. 지금의 미약함을 인정하고 더 전문적인 것에 대한 갈급함과 더불어 확실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되 그것을 소박함 속에 녹여 표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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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 외딴 도시를 걸으며 아버지께 인정받지 못했던 어릴 적 내 모습을 발견하고 어설펐던 내 마음가짐을 떠올렸지만 이곳에서 홀로 걸으며 그것을 뛰어넘어 내가 가져야할 마음가짐과 철학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적한 도시 헬싱키에서 나는 과연 혼자였을까? 30세가 넘으며 바쁜 일상 속 아버지와의 대화가 거의 사라졌지만 이제 늦게나마 그분의 가르침을 다시 느낀다. 특이한 것은 집이 아닌 집과는 한참 떨어진 북유럽에서라는 것이다. 오늘도 난 아버지께 또 하나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