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바다 그리고 나

지상 낙원 달빛과의 조우

by 정인기

한참을 자다가 희미하게 눈이 떠졌다. 커튼 사이로 그림과 같은 빛이 들어왔다. 오전 4시 10분. 트 선생님 호텔이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너무나도 신기해서 창문에 그림을 붙여놓았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 모양 자체가 한 폭의 그림 같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초현실주의풍 그림을 보고 있는 것처럼 무엇인가에 홀린 듯 계속 바라보았다. 색깔도 느낌도 새벽 4시의 몽롱함 속에 그 느낌 그대로 내 마음 가운데 빛이 투영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삼십 여분을 그렇게 누워있다가 이제 테라스로 나가 달빛을 직접 보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조용히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테이블에 사진기를 올리고 의자에 앉았다. 지금도 달빛은 정확하게 나를 비추고 있었다. 지난 수 개월간 북유럽에서 지냈기에 이렇게 찬란해 보이는 달빛은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찬란하게 주위를 비추는 따스한 느낌, 남국의 달빛은 난생 처음이었다. 따뜻한 공기를 마시며 달빛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본다.


검은 하늘과 바다, 그 중간에 애쉬 그레이색 하늘이 있다. 달빛은 나를 바라보고 바닷물 위에 비친 달빛은 레이저 쏘듯 나를 비춘다. 그 위로 돛단배 하나가 홀로 유유자적하게 멈춰서 있다. 달빛이 비춘 야자수가 남국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따뜻한 남국의 달밤. 신비함보다는 안락함과 편안함이 느껴지는 밤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마치 시간이 멈춘듯했다. 이제까지 행복을 찾아 차가운 북쪽나라들만 바쁘게 다녔는데, 이곳에선 모든 것이 느긋하게 흘러간다. 내 여행의 목적은 새로운 것을 찾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었는데 이 곳의 느긋한 느낌이 좋아지는 것은 내가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여행의 새로운 묘미를 발견한 것인가? 이러한 여유로움이 따뜻한 남쪽 나라의 매력인 듯 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돛단배가 물에 비친 달빛 옆으로 움직인다. 돛단배이긴 하지만 돛을 내린 상태인데 움직이는 것은 돛단배일까 아니면 물에 비친 달빛일까.


오늘 이 달빛은 유난히도 나를 비추는 듯했다. 따스하고 강렬한 남쪽나라 달빛과의 조우. 누구든 이 순간이라면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나도 달빛을 쳐다보았다. 이 달빛은 어제도 그제도 항상 나를 비추었을 것이다. 내가 있는 환경이 달라 내 느낌이 달랐을뿐 이 달빛은 어쩌면 차가운 북유럽에서도 동일하게 나를 비추었을 것이다. 도끼와 마법의 지팡이가 활약했던 검은 바다에서도, 바이킹들이 세 개의 검으로 동맹을 약속했던 차가운 바다에서도 어쩌면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 맞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여행을 시작하며 북유럽 크루즈에서 보낸 밤, 수천 년전 바이킹이 활약했던 차가운 망망대해, 크루즈의 옥상에서도 달빛은 나를 비추었었다. 그때에도 정확히 나를 비추었다.


“태양. 햇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해준다는 느낌이 있다.

반면 달빛은 어두운 밤 나만을 지켜준다는 느낌이 있다.”


이것이 달빛의 매력인 듯.


남쪽 나라의 달빛은 더 강렬한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따스함이라는 것은 단지 실체적인 생명만을 부여해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 마음의 감정에도 열정, 지난 시절의 추억, 그리움, 좋건 싫건 모든 것을 떠오르게 해주는 것 같다.


수개월 춥고 추운 겨울왕국을 돌아다닌 후 이제 적도의 새벽. 이 달빛은 이제까지의 모든 여독을 빼주는 아버지의 힐링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서 스포트라이트로 나를 비추시다니. 무엇인가 든든한 맘이 생긴다. 앞으로 달과 대화할 날들이 많아질 것 같다.


‘감사합니다.’


12월의 어느 날 하와이의 달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