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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기 Aug 23. 2023

안개 낀 세상 속에 배트맨을 이야기한다

교육부서에 일하면서 잦은 야근과 합숙으로 피곤하고 지쳐있을 때, 퇴근 후 나에게 유일한 낙이 된 것은 미국의 코믹북이었다. 교육부서에서 근무하면 업무상 책을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기에 퇴근 후에는 글을 읽기가 싫어졌고 작화가 잘 된 코믹북의 그림이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어서 책 보다 더 좋아했었다. 주말에 틈틈이 인터넷으로 주문하거나 미국여행을 가게 되면 표지가 매력적인 코믹북을 구매했다. 그렇게 모은 코믹북이 지금 약 250권에 이른다.      

미국 코믹북은 대체적으로 DC나 MARVEL 코믹스의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인기가 많아 영화로도 제작된다. 그중 DC 코믹스는 1934년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National Allied Publications)으로 설립되었으며 현재 DC라는 명칭은 Detective Comics의 약자이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플래시 등 유명한 캐릭터들을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지만 그중 DC 코믹스의 간판 캐릭터는 배트맨이다. 배트맨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일반 사람이기에 다양한 장비와 코스튬으로 현장을 수사하여 범인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화나 코믹북, 영화를 보고 나면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은듯한 느낌을 받는다. 배트맨의 대표 빌런 중 하나인 라즈알굴이 배트맨을 부르는 호칭도 Detective. 즉, 탐정이다. Detective Comics라는 명칭에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이다. 만화를 보면 빌런들도 빌런이 되는 과정에서 피치 못한 사정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들을 잡는 고뇌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배트맨은 SF나 스릴러 장르로 영화화되어 왔다. 1980년도 이후만 영화화된 단독영화 편수가 여덟 편이며 그 외 스핀오프 영화가 두세 편이 더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추리와 심리적 갈등을 함축하고 있기에 배트맨 영화는 시나리오가 탄탄한 스릴러의 형식으로 만들어지면 호평을 받았고 단순 액션 영화의 형식을 띠면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그중 두 번째 편인 다크 나이트는 영화평론가 사이에서도 최고의 심리스릴러로 통한다. 하지만 나에게 배트맨 작품 하나를 뽑으라고 하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Under The Redhood라는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코믹북의 형태로만 정발 되었고 애니메이션은 나오지 않았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트맨에게 조력자 로빈이 시기별로 다섯 명이 있었는데, 그중 2대 로빈 제이슨 토드가 조커에게 살해당한다. 몇 년 후, 고담시(도시 이름)에 레드후드라는 빌런이 등장한다. 그는 범죄자들을 모두 죽이면서 다닌다. 배트맨은 특유의 추리력을 동원하여 결국 레드후드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제이슨 토드였다. 제이슨 토드는 조커를 잡아놓고 배트맨에게 따진다.     

 

자신을 죽인 조커가 왜 아직도 살아있냐고...  


공포만으로는 범죄자들을 소탕할 수 없다고...

범죄자들은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배트맨에게 총을 던져주며 자신을 죽이거나 조커를 죽이는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해주라는 것이다. 배트맨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고 레드후드는 준비된 폭탄을 개봉한다. 이때 조커는 특유의 광기로 “이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상황”이라며 모두 다 같이 죽어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자고 이야기한다. 결국, 폭탄은 터지며 배트맨, 조커는 살아남고 레드후드는 사라진다.     


코믹북이나 애니를 보면 모든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배트맨은 항상 빌런들을 잡아서 경찰에게 인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빌런을 죽이지 않는다. 영화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첫 편인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초기에 인격적인 성장 과정 중에 있기에 배트맨이 최후에 추락하는 기차에서 빌런에게 “너를 구할 필요는 없다”며 혼자 기차를 탈출하지만 그 이후 편에서는 야경단원으로서의 인격이 조금씩 완성되며 빌런을 어떻게 해서든 살리려고 노력한다.      


조커는 배트맨시리즈에서 가장 메인이 되는 빌런이다. 초기에 가난한 희극 연기자였다가 여러 사건에 휘말리면서 가혹한 현실 속에 정신이 미쳐가고 급기야 빌런이 된다. 증오에 미친 사람은 어떤 일을 저지를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더 무섭다. 조커와 배트맨은 탈출과 잡기를 반복한다. 유독 배트맨 이야기는 일반 사람이 빌런으로 변하는 과정을 전개하며 사람들이 동정심을 느끼게 한다.     

최근 한 피의자가 뉴욕 퀸즈와 브루클린을 스쿠터로 오가며 거리의 사람들에게 산발적으로 총을 난사했다. 뉴욕을 자주 오간 나로서는 섬찟한 뉴스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증오범죄, 무차별적인 범죄가 현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어쩌면 연쇄살인마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묻지 마 범죄라고 생각한다. 증오에 미친 사람은 어떤 일을 저지를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더 무섭다. 증오에 미쳐 아무에게나 피해를 주는 범죄야말로 충격이 큰 것을 우리 사회는 현재 겪고 있다. 인터넷에서 서로 글을 올리며 부추기고 자랑하며 범죄를 행한다.      


이런 피의자가 도주 우려,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기에 불구속 기소되거나 구속되더라도 심신 미약으로 머지않아 풀려나는 경우도 발생하며 피해자, 피해자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분노하고 있다. 부디 선량한 사람들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도록 그리고 피해자가 또다시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법체계에 반영되었으면 하는데...      


묻지 마 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 과연 어느 선까지가 괜찮은 것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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