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서 모래가 나온다고?”
달리는 기차 바퀴에서는 모래가 나온다. 기차 바퀴와 기찻길(레일)은 철로 이루어져 있다. 반드러운 철과 철이 만나 기차 바퀴는 헛돌고 미끄러지기 일쑤다. 눈이나 비 내리고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에는 더욱 심하다. 이럴 땐 선로에 모래를 뿌려주어야 한다. 기관차 운전실에는 모래를 뿌려주는 '살사(撒沙) 버튼'이 있다. 기차가 미끄러지거나 오르기 힘들 때 기관사가 ‘살사 버튼’을 누르면 바퀴와 연결된 장치에서 나온 고운 모래가 레일에 흩뿌려진다. 바퀴와 레일이 달라붙도록 마찰력을 높여주는 것이다. 모래는 미끄러운 바퀴를 잡아 기차를 빨리 멈추게 하는 일도 한다. 하려는 일이 풀리지 않아 어렵고 힘들 때 기관사는 모래를 사용한다. 모래는 미리 채워두고 확인해야 한다. 기차를 달리고 멈추는 데 도움을 주니까.
기차에 모래가 있다면 나에게는 가족이 있다. 성당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하고 들뜬 마음으로 신혼집을 멋들어지게 꾸몄다. 꽃으로 분위기를 내고 어항으로 집안 습도를 맞췄다. 최신 음향 장비와 몸동작 인식하는 게임기도 장만했다. 컴퓨터는 두 대를 놓고 아내와 한 대씩 차지했다. 총 쏘는 전쟁 게임도 늘 같은 편을 했다. 셋이 치는 온라인 고스톱판에 들어가 둘이서 몰래 짜고 쳤다. 그렇게 낄낄거리며 게임하고 영화도 보고 놀았다. 놀다 배고프면 주변 맛집 음식을 포장해 먹었다. 아내가 밤늦게 집에 간다는 소리 안 해서 좋았다. 심지어 잠도 같이 잤다. 볼 장 다 봤는데 신기하게도 양가 부모님들은 대견해하셨다. 이게 결혼이라니 꿈만 같았다.
‘언제까지 힘이 드는 걸까.’
아이가 태어났다. 살면서 거저 얻는 건 없다더니 자식도 그랬다. 몰랐다. 이런 건지 몰랐다. 왜 어른들 말씀은 꼭 상황은 벌어지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는 걸까. 퇴근하면 다시 출근하고 싶어졌다. 태어난 아이를 안고 혹여 놓칠까 조심스러웠다. 아이는 안아주면 잠이 들었다가도 내려놓으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깨어났다. 하루는 유모차에서 곤히 잠든 아이를 보고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떠나가라 우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잠들 때까지 무작정 걸어 다니길 반복했다. 나는 고작 몸이 고단했을 뿐, 하지만 아내는 마음도 지쳐 더 힘들어했다. 집안에 꽃은 잎이 때어져 남아나질 않았고 어항 속 물고기들은 휘젓는 손길에 죽어 나갔다. 오디오는 CD 넣는 구멍에 동전을 잔뜩 넣어놔 저금통이 따로 없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전쟁통에 둘째를 낳았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같은 아들이지만 둘째는 첫째와 다르게 얌전했다. 우리도 익숙하고 무뎌져서 그런지 능숙해졌다. 귀여운 어리광도 눈에 들어왔다.
“아빠 출근하지 마.”
붙잡고 울먹이는 아이를 놓고 도망쳤고 돌아오면 두 팔 벌려 품에 안겼다. 두 아들에 이어 셋째는 딸을 낳았다. 성별을 알려주시던 의사 선생님이 어찌나 좋던지 하마터면 안아드릴 뻔했다. 셋째가 태어나는 날, 첫째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근데, 아기는 계속 나오는 거야?”
사실 힘들다. 힘들어서 힘든데 힘들면 안 되니까 힘들다. 그래도 기도하며 기댈 곳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기관사가 '살사(撒沙) 버튼' 누르듯 기도한다. 집에서는 꽃을 보듯 아이들을 보고 힘을 낸다. 작은 물고기들은 이제 없지만, 평생 함께할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좋다. 하물며 가족이다. 망가진 오디오는 아이들 복작거리는 소리로 갈음한다. 아이들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즐겁다. 그러다 누군가 아프면 가슴이 아려온다. 가족들은 기차에서 나오는 모래 알갱이처럼 나를 달리고 멈추게 한다. 기관사는 어렵고 힘들면 모래를 사용한다. 평소 별거 아니어도 위기가 오면 안다. 흐린 날 가파른 오르막길 모래는 꼭 있어야 한다는 걸. 없다고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