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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이름으로

by 레이노

“엄마가 한국무용을 하셨다고?”

어머니는 무용단 단원이셨다. 사진을 보기 전까지 믿지 않았다. 나와 여동생 그리고 외사촌들 생김새를 한데 뭉쳐 고운 얼굴. 터울이 있는 오빠 둘은 사업을 했고 집은 넉넉하게 살았다고 한다. 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엄마도 젊은 시절이 있었을 텐데.

“하마터면 일본에서 살 뻔했어.”

옛이야기치고 사업 잘되는 꼴을 못 봤다. 오빠들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형편은 어려워졌다. 갑작스레 대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는 상황. 서울에 잘 나가는 무용학원 원장님께서 재능 묵히는 게 아깝다며 일본에서 돈도 벌고 학교도 다닐 수 있도록 자리를 알아봐 주셨다고 한다. 하지만 마동석 닮은 큰 오빠가 제안을 단칼에 뿌리치셨다고. 멸치잡이로 팔려 갈지 인신매매로 넘어갈지 좀체 믿음이 안 가셨다나. 어머니는 무용을 포기하고 돈 버는 일에 힘쓰셔야 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어린 여동생 걱정하는 오빠들과 의초롭게 지내신다.

“포기하니까 안 한 게 되더라. 그래도 네 엄마가 부기 반에서 주판알은 제일 잘 놓았어.”

자존감 충만하셔서 다행이다. 자칫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볼 뻔했다.

어머니는 신혼 초 계모임을 하셨다. 일이 잘못되었는지 계주였던 분이 달리기 계주하듯 사라지셨다. 결혼 때 오빠들이 해준 예물까지 몽땅 팔아 곗돈에 넣었다고 하니 속이 터졌을 법하다. 나중에 돈은 일부 돌려받았다고 한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돈이지만 아버지께서 만회할 기회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임을 같이 했던 동생에게 깡그리 가져다주셨다.

“돈은 잃어도 형제는 잃을 수는 없다.”

아버지께서 헤아리시는 마음 와닿는다. 하지만 불난 어머니 가슴에 한사코 기름을 뿌리셨다. 어머니께서 동생과 나를 붙잡고 서럽게 우시던 그날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원칙과 소신을 아내에게 지키면 어찌 되는지도 몸소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 형제들은 찢겼고 오갈 때 없는 할머니를 아버지가 모셔 왔다.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셨다.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는데 어머니를 무척 괴롭히셨다. 이따금 물건을 잃어버리셨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를 의심하셨다. 뜬금없이 어머니에게 숟가락을 휙 던지시고 화를 내셨다. 그렇게 성을 내시고는 뒤돌아 어머니를 또 찾으신다. 어머니가 없으면 몸을 씻을 수도, 볼일을 볼 수도 없었다. 할머니시간은 거꾸로 흐르는지 할머니는 점점 아기가 되셨다. 할머니는 십수 년 동안 우리와 함께 사셨고 결국 어머니 곁에서 잠드셨다.

우리 가족은 명절이면 할머니 산소를 돌본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할머니가 계신 '천주교 공원묘지'를 계약하고 오셨다. 십자가가 잘 보이고 일조권이 확보된 남향의 전망 좋은 자리를 분양받았다며 좋아하셨다. 죽어서도 조망권인가. 자리가 얼마 없어 먼저 분양받았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할머니 보러는 안 올 거잖아. 나중에 엄마 찾아올 때 꼭 할머니도 꼭 챙겨줘”

어머니가 앓은 고통은 이야기가 되었고 아픔은 추억이 되었다. 집안 주도권을 빼앗기신 아버지는 어머니 눈치를 살피시고 슬그머니 나가서 하시고 싶은 거 하고 사신다. 밤마다 엄마 눈물을 닦아주던 여동생은 지금도 엄마를 끔찍이 챙긴다. 자기는 중국 살면서 오지도 않으면서 한국에 있는 나를 아바타로 생각해 전화로 일거리를 지시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은 병이나 사고 없이 잘 지낸다. 잘 지내서 지난 일이고 추억이다. 어쩌면 과거도 현재가 만드는 게 아닐까. 어머니의 이름으로 만들고 이루셨다. 잊지 않기 위해 어머니 발자취를 기록해 둬야 한다. 어머니 인생 자체가 예술이다. 무용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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