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닮은 아버지
기차는 알면 알수록 새삼스레 다가왔다. 마치 아버지처럼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은 속도를 올리지 않는 거야.”
아버지는 기차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해주셨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선로에서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은 내리막길에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예측해서 속도를 올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열차 운전은 출발해서 5분, 도착하기 전 5분이 가장 중요해.” 축구 해설에 나올법한 이야기도 아버지는 기차 운전에 빗대어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철도 기관사였다. 1백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운행하셨고, 지금은 은퇴하셨다. 사실 나는 아버지를 싫어했었다. 아버지는 그저 돈 버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셨다. 속 마음을 잘 드러내지도 사람들과 사귀려 들지도 않으셨다. 얌전한 마음씨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아버지 기관사 시절에는 사고 없이 1백만 킬로미터를 운행하면 훈장을 수여했다. 아버지는 훈장을 타려고 휴가를 내지 않으셨다.
“그깟 훈장이 뭐라고 또 빠져!”
어머니에게 늘 혼나는 아버지 모습도 싫었다. 부자지간에 대화라고는 없었다. “놀지 말고 공부해”라는 소리만 입에 배어 말씀하셨다. 가족 여행과 외식 자리에 아버지는 없었다. 명절과 공휴일은 으레 안 계셨고 주말도 일하러 나가셨다. 내가 자면 출근하셨고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주무시고 계셨다. 이른 새벽 옷가지 주섬주섬 챙겨 슬그머니 현관문 열고 나가시는 아버지 뒷모습을 보며 이불속에서 다짐했다.
‘난 이담에 커서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기관차 운전실을 친구와 함께 구경시켜 주셨다. 친구와 나는 보자마자 실망했다. 기차는 자동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온갖 종류의 전자 기기들로 가득 찬 공간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바닥에는 신문지가 널브러져 있었고 알 수 없는 쇠뭉치들과 소란스러운 기계음으로 가득했다. 친구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인기야, 너 아빠한테 잘해야겠다.”
열악한 근무환경에 힘들게 일하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실 그날 나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나이 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멋들어진 일들은 많지 않았고 실력은 형편없었다.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놀지 말고 공부 좀 할 걸 그랬다. 적성 따위는 사치였다. 취업은 선택이 아니라 채용이 우선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취업 준비에 한창이던 내게 철도청에서 철도공사로 전환된 상황과 고속열차 도입으로 달라진 근무환경을 말씀해 주셨다. 모집 공고 한 장을 내미시더니 ‘기관사 공채 시험’ 응시를 넌지시 권하셨다. 현재 나도 기관사로 살고 있다. 뭐 대단한 뜻을 품고 아버지 뒤를 이은 건 아니다. 그런대로 적응하다 보니 성격에도 맞았다. 기차는 알면 알수록 새삼스레 다가왔다. 마치 아버지처럼.
‘아빠가 직장 선배라니.’
아버지와 2년 동안 같은 사업소에서 기관사와 부기관사로 근무했다. 동네 낯익은 얼굴의 아저씨들이 여기 다 계셨다. 내가 아버지처럼 기관사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퇴근하고 난생처음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기관차 제동은 어떻게 쓰는 거예요?”
말을 주고받으려고 아는 걸 모르는 척 묻기도 했다. 직원들은 부자지간에 같은 열차 승무를 권유했지만, 아버지는 한사코 거절하셨다. 억지 부려서라도 한 번 해볼 걸 그랬다. 후회된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와 함께 근무한 2년이라는 시간은 소중했다. 이제 아버지와 근무했던 부기관사들은 나와 일하는 기관사가 되었다. 아버지 동료가 내 동료가 되면서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사실과 달랐다. 당시 근무 환경과 형태가 지금과 달랐고, 직장 문화도 형편없었다. 눈치도 융통성도 없는 내성적인 아버지는 휴가 신청도 못 하고 승진과 발령에 밀려 고생하셨다고 한다. 일생 외길만 걸어오신 아버지 경력에 1백만 킬로미터 훈장은 자연스레 받는 걸 가지고 괜한 탓을 했다. 기차가 밤낮 가리지 않고 주말과 공휴일 따져 멈출 리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었는데, 나도 참 철딱서니 없었다.
올해로 일흔다섯 되신 아버지는 예전처럼 기차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지 않으신다. 속도를 내지 않아야 빨리 갈 수 있다는 아버지의 기차 이야기가 그립다.
"평택역을 그냥 지나쳤어."
악몽은 은퇴가 없나 보다. 퇴직하신 지 15년이 훌쩍 지났는데, 정차역 통과하는 꿈을 아직도 꾸신다. 나도 가끔 끔찍한 꿈에 시달린다.
‘아빠처럼 살겠지...’
점점 아버지 같은 나를 발견한다. 닮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꿈마저 똑같이 꾸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