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운전은 사람과 화물을 실을수록 힘들다. 사람과 짐을 내려놓으면 아무래도 낫다. 기관차가 느끼는 부담을 기관사도 느끼는 걸까. 연결된 객차나 화차 없이 기관차 홀로 선로를 달리면 편안해질 때가 있다. 어디 기관차만 그러겠는가. 결혼 전에는 외로움에 사무쳐 몸서리쳤는데 아빠가 되고 나니 자유를 갈망한다. 지금 나는 외롭지 않다. 다만 자유에 목마를 뿐.
지난해 '희망철도재단'에서 진행하는 '남북/대륙/공공 철도 체험학교'에 응모했다. 한 달에 두 번 철도 교육, 연구, 토론하고 철도 발자취도 찾아 떠난다. 아내도 흔쾌히 허락했다. "아예 집에 안 들어와도 돼"라는 뼈 있는 농담을 건네긴 했지만...
체험학교 마지막 여정은 베트남 대륙 철도 체험이다. 7박 8일 동안 베트남 역사를 배우고 전쟁의 흔적 곳곳을 마주한다. 하노이에서 호찌민(사이공)까지 1,726km 총 33시간, 베트남 종단 열차에 몸을 싣고 달린다. 저 멀리 자유가 손짓하지만, 아내에게 말할 용기가 안 나 며칠을 망설였다. 머뭇대는 동안 집 안 화장실 청소에 집중했다. 예상외로 아내는 쉽게 허락했다. 이따금 집안에 한숨 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른체했다. ‘버티자. 곧 해방이다.’
‘어쩜 이렇게 우리와 닮았을까.’
베트남도 식민지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했다.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를 나란히 받으면서도 자유와 인권을 외쳤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베트남 영웅 호찌민은 그해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못마땅한 프랑스는 기어코 전쟁을 일으켰고 베트남은 끝끝내 승리했다. 하지만 북위 17도를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게 된다. 세상은 남 잘 되는 꼴을 못 봐서 온갖 예속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
‘지금쯤 아빠를 찾겠지? 걱정하려나?’
“잘 도착했어”라고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답장이 왔다.
“아프지 말고 잘 놀다 와” 아내가 보내온 시원시원한 대답이 괜스레 마음에 걸린다.
1960년 남베트남과 미국, 북베트남과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전쟁을 벌인다. 1964년 우리나라도 미군을 도와 파병을 결정한다. 호찌민이 이끈 북쪽 베트남은 또 승리했고 베트남은 통일을 맞이한다. 냉전 시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나뉜 세상은 둘이 아닌 하나를 강요했다. 둘은 결국 싸웠고 결과는 참혹했다. 나는 어떠한 이유로도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지른 범죄는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전쟁 박물관에 전시된 유린당한 아이들 사진을 보면서 화가 났고 이내 우리 아이들이 떠올라 감사했다. 사실 아내와 내가 다투는 것도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만 아픔을 보듬어 아우르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참을 망설이다 카톡 전송 버튼을 눌렀다.
“미안해 혼자 와서. 다음에는 같이 오자”
도착한 숙소 근처에 성당이 보인다. ‘성당이니까 미사도 하겠지?’ 나란 인간 종잡을 수 없다. 해외 나오면 애국자 된다더니 성당을 보고 미사 드릴 생각을 하고 있다. 없으니까 또 그립다. 이른 아침 다시 찾은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베트남 음식은 한국 맛집 음식처럼 입에 맞았다. 다만 아내는 고수를 못 먹을 거 같고 ‘반미’라는 샌드위치는 아이들도 좋아할 거 같았다. 망고를 좋아하는 막내딸이 여길 왔어야 했다. 갈 때 말린 망고라도 사야겠다. 대륙을 종단하는 침대 열차는 느렸지만 4인 침실은 나름 쾌적했다. 시간 지나면 다시 타러 와야지. 우리 가족이 한 칸 차지하고 놀면 딱 좋겠다.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하는 기차역에서 내 마음은 설렘과 그리움을 반복했다.
예정된 베트남 여행도 절반이 지나가자 김치랑 깍두기가 생각났다. 평소 잘 먹지도 않는데 막상 없으니 특별해졌다. 소중한 건 김치, 깍두기처럼 평범한 게 아닐까. 동료들과 먹고 놀고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다가도 문득 내게 의지하는 얼굴들이 떠오른다. 아이들 연락에 어깨를 으쓱거렸고 아내가 평온하지 못하면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래 이번 생은 글렀다. 멀어질 수 없는 한 울타리, 우린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