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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사 마음 사전

by 레이노

가드레일 : 열차가 달리도록 거들어주는 레일이다. 어긋나지 않고 바르게 가도록 안내한다. 항상 올곧아야 하는 건 아니다. 늘 바르고 곧은 열차는 위험하다. 뱀처럼 살랑대고 오리처럼 뒤뚱거려야 사고가 없다. 가드레일은 탈선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 나에게도 가드레일이 있을까. 나는 누군가의 가드레일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어릴 때는 부모님 잔소리와 선생님의 몽둥이가 있었고 지금은 아내와 아이들이 내가 달리도록 도와준다. 또 곁에 누가 있을까. 가드레일이 레일 안쪽에 설치된 것처럼 내가 가진 가드레일도 결국 내 마음속에 있는 건 아닐까. 이만하면 잘살고 있는 거다. 이 정도면 괜찮다. 아니라고? 어쩌겠어. 마음먹기에 달려있는데.


노반 : 다져놓은 땅을 말한다. 단단한 노반이 튼튼한 철도를 만든다. 노반이 단단해야 마음놓고 선로도 놓고 정거장도 만들 수 있다. 사람도 기본이 튼튼해야 한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라는 손흥민 아버지 말씀처럼 기본이 튼튼하면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 모르는 거다. 인생은 월드클래스를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다 잘 사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학창 시절 오락실 조이스틱만 만지작거리던 내가 지금은 기관차를 다루고 있다. 기본이 뛰어났다면 전투기나 우주선 조종을 했으려나? 다행이다. 하마터면 어릴 때 공부할 뻔했다.


단행 기관차 : 객차나 화차의 연결 없이 홀로 달리는 기관차를 말한다. 짐 덜어놓으면 편하다. 때론 부럽기도 하다. 우리 애들은 언제 크는 걸까. 혼자 살겠다고? 왜 결혼을 안 하는 거지. 아니 결혼했으면 애를 가져야 할 거 아니냐고. 어떻게 그래. 나만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로코모션호 기관차 : 1825년 조지 스티븐슨이 만든 세계 최초의 기관차. 증기 기관차부터 전기 기관차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기관차도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했다. 나도 각오는 하고 있다. 우리 사업소에 “코에 피어싱하고 팔에 용 문신한 후배가 들어올 수 있다”라는 마음은 항상 갖추고 있다.

무선전화기 : 답답하다. 아무리 무전기로 불러도 대답이 없다.


볼륨 : 창피하다. 무전기 볼륨이 낮춰져 있었다.


시간 : 철도는 시간을 창조했다. 열차는 정확하다. 제시간에 정확히 도착한다. 물론 백 퍼센트는 아니다. 절대라는 건 세상에 없다. 대체로 그렇다는 거지. 열차 지연에 따른 배상 내용은 코레일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길.

알람 : 기관사는 시간 약속에 날카롭다. 시계 알람을 달고 산다. 달리던 열차가 고장으로 멈춰서는 일이 없고 새벽 알람을 맞추지 않고도 잠들 수 있다면 편안할까. 배고프면 언제나 먹을 수 있고 배 아프면 아무 때나 화장실 갈 수 있다면 편할까. 부족한 건 늘리고 잘못된 건 고쳐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 편하기만 한 일이 어디 있겠나. 마냥 편한 게 좋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모자람 없이 좋다’라는 생각도 필요하지 않을까. 지나치면 안 된다. 그러다 '무인 운전' 되는 수가 있다.


제어대 : 금연 53일째. 운전실 제어대 바닥에 놓인 담배 한 갑을 발견했다. 교대 승무원이 떨어뜨렸나 보다.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꾹 참았다. 나는 도착할 때까지 두고 내린 담배에 손을 대지 않았다. 비결? 왠지 그래야 이 글이 완성될 거 같아서.


차창 : 기관차 창문을 열자마자 차창 밖으로 날아가 버린 승무일지. 객차 창문은 열 수 없지만, 기관차 창문은 여닫을 수 있다. 나는 가끔 열차가 한강 철교를 지날 때면 창문을 열고 기지개를 켠다. 팔, 다리를 쭉 뻗어 피곤을 쫓는다. 그러고 나면 문득 떠오른다. 뭐 하고 지낼까. 서울 한강 근처 어딘가에 잘살고 있겠지. 누구? 아, 아니. 그때 그 승무일지.


KTX : 나는 ‘무궁화호’다. 나를 보며 사진 찍던 아이들이 새로 나온 ‘KTX 이음’ 열차가 도착하자 우르르 몰려간다. 나도 한때는 ‘비둘기호’, ‘통일호’보다 잘 나갔는데. 쳇! 너도 그런 날 온다. 겸손해라. KTX 붙은 것들.

퇴근 : 아름답다. 밤낮과 기후를 가리지 않는다. 간혹 집안일과 육아는 다시 출근하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기쁘다. 오늘이 즐거운 건 쉬는 날이기 때문이다.


플랫폼 : 건너편 플랫폼에서 발 동동 구르고 있는 손님을 본다. 거기가 아닌가 보다. 당장 넘어올 수도 넘어가서 태울 수도 없는 승객을 바라보는 딱한 마음. 그나저나 어쩌나. 막차인데.


합병운전 : 두 개의 열차를 한 개의 열차로 합쳐서 운전하는 방식. 열차 번호도 서로 다르게 유지하면서 운행한다. 따로 가는 것보다 하나로 가야 더 이득이다. 부부도 하나다. 하나로 지내다 더 늘어났지만 그래도 하나다. 아내, 아이들과 때로는 타인처럼 살고 있다. 고장 열차를 구원하려면 합병해야 한다. 살면서 어디 고장 나 억지로 합병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열차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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