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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노 Feb 24. 2020

사랑한다, 그 쉽고도 어려운 말 한마디

 새벽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명상한다. 명상을 처음 접한 건 부모님께서 마련하신 시골 농가주택이 다른 사람 땅을 침범했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무렵이다. 이웃 간 토지 분쟁 속에서 화를 다스리는 데 도움을 받았다.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명상이 아니었다면 서로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어릴 땐 힙합을 좋아해 허구한 날 웅얼웅얼 지껄였는데 이제는 어수선하지 않은 것들에 눈길이 간다. 가사 없고 분위기 있는 잔잔한 클래식과 재즈를 한 스푼씩 담아 하루를 시작한다. 왜 좋은지 여간해서는 알 수 없던 음악도 빈번히 듣다 보니 빠져들었다. 수백 년 전해 내려오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걸까. 아내가 일어나기 전 샌드위치를 만들고 달걀을 삶는다. 아내는 익지도 흐르지도 않는 보드라운 노른자를 좋아한다. 반숙은 끓은 물에 달걀 넣고 8분, 찬물은 12분이 황금시간이다. 이제 커피를 내릴 시간. 원두 갈리는 소리는 요란스럽지만, 은은히 퍼지는 커피 향을 즐긴다. 커피 향이 집안에 스며들면 간단히 화장실 청소를 한다. 화장실 청소는 아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완벽한 하루.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맞이하고 싶다. 오늘을 두 번 살 수는 없으니까.   

   

 “딸 잘 잤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저리 좀 가라고!” 

초등학교 3학년 막내딸을 안아주려다 낭패를 봤다. 살짝 만졌다고 호들갑을 떤다. 남자친구랑은 동네에서 팔짱 끼고 돌아다니면서 아빠는 털끝도 못 건드리게 한다. 엄마 품은 잘도 파고들면서 아빠한테는 남자가 어딜 만지냐며 큰 소리다.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아들, 오늘 농약 사러 같이 갈 수 있나? 복숭아나무 다 죽게 생겼어.”

복숭아나무 고작 두 그루다. 누가 보면 과수원 하는 줄 알 거다. 스무 평 남짓 되는 텃밭에 남들 하는 건 다 하시려고 한다. 모처럼 쉬는 날 농약 사러 반나절을 허비하게 생겼다.

“다 이리로 와! 빨리 샌드위치나 먹어” 

아내는 말을 해도 꼭 저런다. “샌드위치”라고 안 하고 “샌드위치나”라고 한다. 

“아빠가 오줌 눌 때는 변기 시트 열라고 했지!” 

후회된다. 오줌 싸는 일이 뭐 대수라고 아이들한테 소리를 쳤을까? 부모님 댁 화장실을 40년 넘게 들락거리면서 청소 한 번을 안 했으면서 자기 집 생겼다고 속 좁게 성내는 모습이 우습다. 둘째와 첫째 아들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음악 선곡으로 다툰다. 둘째는 걸그룹이고 첫째는 곧 죽어도 힙합이다. 

“정신 사납게 아침부터 집안을 클럽으로 만들어야겠어!” 

아차! 또 소리를 질렀다. 잘못된 훈육은 아내와의 다툼으로 이어진다. 말로 다 까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과 아내가 함께한 술자리, 아내는 힘들다며 눈물을 흘렸다. 

“퇴근하면 집안일 도와줄게. 우리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자”라고 말했을 뿐이다. 

“오빠. 집안일은 도와주는 게 아니야. 같이 하는 거지.” 

옆에서 꼬박꼬박 따지고 드는 여동생의 침착한 목소리는 술을 퍼마셨음에도 논리 정연했다. “오빠, 우리 모두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해. 애 셋 낳고 경력이 단절돼버린 새언니한테 이제 와서 그런 말 하면 맞벌이하자는 압력으로밖에 안 보여.” 

신기하다. 내 뜻이 입을 통해 나오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집안일, 자기가 좋아서 한 거잖아.” 

아 그랬다. 내가 좋아서 한 거다. 나를 위해 내가 담배를 끊고 내가 술자리 싫어서 피하고 집에 일찍 온 거다. 생각해 보면 음악 듣고 커피 내리는 일, 요리, 화장실 청소 모두 혼자 좋아서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네...”

답답하다. 내가 잘못된 걸까 잘 모르는 걸까. 다음 날 아침 아내는 머리를 매만지며 술김에 한 말이라고 사과했다. 아니라고는 하지만 혹 진심은 아닐까.     

 

 “아내를 아름답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이 멋진 말이 그때는 왜 생각이 안 났는지 환장할 노릇이다. 모든 노력은 마음을 담아야 빛이 난다. 마음에 머물지 말고 전해야 한다. 애당초 깨끗한 화장실에만 힘쓸 일이 아니었다. 혼자 애쓰고 상처받을 일이 아니라 안아주고 “사랑한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우선이었다. 사는데 정답은 없지만, 문제와 답은 내가 가지고 있다. 답은 말처럼 쉽다. 시험 문제 답은 모르지만, 부부관계 답은 알고 있다. 하지만 결과는 같다.

잘 못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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