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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노 Dec 24. 2019

뜨거운 포옹을 나누던 자리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까

철길이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다툰다

 나는 ‘평화’라는 말이 좋다. 다른 사람에게 누 끼치기 싫어하는 내 기질도 한몫하겠지만 단어 자체가 주는 따스함이 좋다. 평온하고 화목하다는 뜻의 평화. ‘평온’은 전쟁이나 분쟁 같은 탈 없고 갈등 없는 조용한 상태를 말한다. ‘화목’은 뜻이 맞고 정다움을 말하는데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말은 참 쉽다. 하지만 어디 세상일 말처럼 손쉬운 일이겠나. 이웃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라는 예수님 말씀과 “마음의 평화”를 강조하신 부처님 가르침도 세상 물정을 알고 나면 복잡해진다. 어린 시절 유치원 선생님에게 배운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고운 말도 어른이 되면 새롭게 받아들인다. 이롭고 해로운 정도를 따져 각자 나름의 평화를 이룬다. 나는 아내와 중국집 짬뽕 국물 서비스 문제를 놓고 다투면서 깨달았다.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생각이 다를 수 있구나.’ 

동네 중국집 짬뽕 국물 문제만 해도 이러한데 중국과 미국 그리고 북한 정부를 대하는 사람들 생각은 오죽하겠나. 남한과 북한은 두 갈래 철길처럼 만날 일 없다는 듯 서로 마주 보고 다퉜다. 다신 안 볼 것처럼 마주 보고 다퉜지만, 철길도 결국에는 같은 곳을 향한다. 두 갈래 철길은 만날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떨어질 일도 없다. 평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뜨거운 포옹을 나누던 그 자리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까. 우리는 평화롭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손기정 선수는 서울역에서 베를린 마라톤 출전을 위해 기차를 타고 달렸다. 안중근 의사는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하얼빈역을 향해 총을 들었다. 한반도가 하나로 이어졌듯 철도는 본래 하나였다. 하나로 엮인 철도는 우리의 삶과 문화를 바꿔놓았다. 내륙과 바다를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놓이고 노량진에는 수산 시장이 생겼다. 영국에 철도가 생기고 감자를 먹던 내륙 사람들에게 생선을 공급해 곁들여 먹게 되었다는 피시앤칩스(FISH & CHIPS) 유래와 같다. 철도는 경제를 성장시켰고 시간을 만들었다. 가보지 못했던 그리움과 갈등을 없애주었다. 서로를 이은 철도는 공간을 살해했고 만나지 않아서 생긴 오해를 눈 녹듯 녹여냈다. 이참에 우리 집에도 하나 들여놓고 싶은 심정이다. 경상도 대구와 전라도 광주를 바로 잇는 철도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땅에 지긋지긋한 동서 갈등도 진작에 없지 않았을까.      


 작년 봄, 강원도 양양에서 최북단 제진역까지 사라진 철도 발자취를 돌아보는 '남북/대륙/공공 철도 체험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기점으로 중국을 통해 인도까지 진출할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철도를 건설했다. 경제적, 군사적 이유로 놓인 선로는 양양에서 동쪽 해안을 따라 바다를 품고 원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한때 군대 유격장에서 했던 가혹행위 '원산폭격'의 원산은 북한 함경남도 지방에 있는 폭격 맞은 항구도시 원산을 말한다. 원산에서 강원도 양양까지 놓인 동해선은 부산으로 더 뻗지 못하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단절된 채로 버려졌다. 갯내음 물씬 풍기는 동해안 곳곳에 방치된 교각과 터널에는 총탄의 상흔이 선명했다. 일본식 가옥들은 시간이 지나 허물어지고 변형되었지만, 옛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적산 가옥과 철도관사에는 지금도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옛 정거장에 남은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로는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DMZ을 목전에 두고 찾아간 최북단 제진역에 기차는 남북 어디로도 오갈 수 없어 멈춰있었다. 설렘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비운의 역.     

 현재 새로운 동해선 공사가 한창이다. 부산에서 영덕, 강릉, 제진역을 지나 원산, 금강산, 나진역까지 한반도 종단 철도 완성을 앞두고 있다. 완공된 철길은 나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결될 것이다. 남과 북이 협력하면 유럽까지 연결된 철도를 통해 평화, 문화, 경제 발전을 앞장서 이끌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울림 있는 그날이 올까. 둘 중 하나다.

"누군가의 생각이 바뀌거나, 아니면 내가 오래 살든가."   


 물은 갇히지 않고 흘러야 한다. 흘러야 썩지 않는다. 썩지 않고 흐른 물이 꽃을 피운다. 사람과 사람도 흐르는 물처럼 오가면 대립은 사라지고 믿음이 쌓여 서로 의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70년 넘게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철길은 대륙을 향해 뻗어 있지만 철조망에 막혀 기차는 저 너머로 흐를 수 없었다. 남북 관계는 방도가 없어 앞이 깜깜하다. 철도가 얽힌 오해를 풀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철길은 서로를 이어준다. 서로 오가면 갈등은 사라진다. 철도가 답이다. 이미 다 놓여 있는 철길이다. 누구 하나 손해 보는 일도 아니다. 철조망 거두고 휴전선을 뚫고 기차는 달려야 한다. 평화를 거부하거나 철길을 가로막는 자 있다면 그가 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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